후궁은 모두 장희빈 같은 악녀? 조선 후궁 175명의 실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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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의 남자'에서 장녹수 [사진 시네마서비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장녹수 [사진 시네마서비스]

'동이' '장희빈' '여인천하' '왕의남자' 등 유명한 사극을 보면 후궁은 국왕에 버금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은 궁중에 앉아 조선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희빈장씨, 경빈박씨, 장녹수 등 대중에 익숙한 후궁도 많다. 이들은 대개 미천한 신분으로 시작해 권력의 중심부에 올라가는 입지전적인 신분 상승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실제 조선의 후궁은 어땠을까.

『조선왕실의 후궁』, 후궁 전수조사 #"후궁은 고위 가문 출신도 많아" #장희빈 이후 후궁 영향력 감소

최근 발간된 『조선왕실의 후궁』은 조선시대 후궁 175명을 전수조사해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낸 책이다. 이미선 한신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후궁이라 하면 흔히 궁중 암투를 벌이는 요녀(妖女)의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선입견을 없애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와 책의 내용을 통해 조선 후궁의 세계를 Q&A 형식으로 정리해봤다.

이미선 한신대 한국사학과 교수 [사진 지식산업사]

이미선 한신대 한국사학과 교수 [사진 지식산업사]

장희빈이나 장녹수 등의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왕비는 고위 집안, 후궁은 한미한 출신이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그렇지 않다. 후궁은 정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간택 후궁'과 궁녀나 외부인(기생, 여종 등)이 승은(국왕과 동침)을 입고 후궁이 된 '비간택 후궁'으로 나뉜다. 간택 후궁은 왕비나 세자빈을 뽑을 때처럼 선발기구를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려서 정식으로 선발했다. 그래서 당대 유력 가문에서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세종 때 후궁으로 선발된 명의궁주 최씨는 조부가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이고, 부친은 판돈령부사까지 올라 청백리로 꼽힌 고위 인사였다. 성종의 후궁 숙의남시는 유명한 재상 남지의 증손녀였다. 한편 조선 초기 국왕들은 왕권 확립을 위해 명망가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고, 후궁 제도를 이용했다.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가 묻힌 무덤에서 출토된 화장품 그릇. 원빈 홍씨는 정조 때 세도가인 홍국영의 누이동생이다. [사진 지식산업사]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가 묻힌 무덤에서 출토된 화장품 그릇. 원빈 홍씨는 정조 때 세도가인 홍국영의 누이동생이다. [사진 지식산업사]

장희빈이나 장녹수 같은 경우는 출신이 한미하지 않았나
그들은 비간택 후궁이다. 초기엔 여종이나 기생 등이 비간택 후궁이 됐는데, 후기엔 중인 가문이나 양반의 서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출신 신분이 올라갔다. 희빈 장씨는 조상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중인 집안 출신이다. 다만 희빈 장씨의 숙부는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갑부였고 이런 경제력으로 종실 및 남인 세력과 결탁할 수 있었다. '여인 천하'로 유명한 경빈 박씨는 부친이 하급 군인이었다. 
후궁은 비상식적인 악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소재로만 쓰이다 보니 그렇다. 문종 때 현덕왕후는 후궁 출신으로 왕비까지 됐는데 현숙한 여인으로 칭송받았다. 또 일부 후궁이 정치적이거나 간악한 성품이 부각된 남성 중심적 사관(史觀)의 영향도 있다. 희빈 장씨는 양반이 아닌데 왕비에 오른 유일한 사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희빈 장씨가 폐비된 뒤 숙종은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제도를 바꿨다. 그래서 이후엔 명망가에서는 후궁을 잘 보내지 않았다. 왕비가 될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희빈 장씨를 다룬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중 일부 [자료 SBS]

희빈 장씨를 다룬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중 일부 [자료 SBS]

후궁들이 정치에도 많이 개입한 것 같다.
주로 장녹수, 김개시, 희빈 장씨 등이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비간택 후궁이다. 또 시기적으론 16~17세기인데 이때는 조선의 사회변동이나 정치변동이 크게 일어난 시기였다.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 또는 대규모 옥사나 환국 등이 일어나면서 후궁에게 왕과 정치세력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 부여됐다. 반정이 일어난 뒤 왕권 교체세력이 연산군과 광해군의 후궁을 처단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숙종 때 희빈 장씨 이후로 후궁에 대한 제약이 커지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사라지게 됐다.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가 후궁으로 간택됐을 때 치렀던 가례 내용을 기록한 '숙의가례청등록'[사진 지식산업사]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가 후궁으로 간택됐을 때 치렀던 가례 내용을 기록한 '숙의가례청등록'[사진 지식산업사]

후궁은 어떤 대우를 받았나?
간택후궁은 정1품(빈)에서 종2품(숙의)까지, 비간택후궁은 정1품(빈)에서 종4품(숙원)까지 봉작(封爵)될 수 있었다. 이들은 왕자녀를 출산하면 궁궐 바깥의 ‘제택(第宅·살림집)’과 200결 이상의 전지(田地) 등을 받았다. 공신이나 정승급 대우다. 이 외에 정5품 상궁부터 정9품 주변궁까지의 궁녀가 있다. 이들은 후궁 후보자였고, 모두 일정한 월급을 받았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최말단 궁녀에서 시작해 정1품까지 오른 사례다. 
조선 국왕은 대개 몇 명의 후궁을 두었나?
27명의 조선 국왕은 평균 6.4명의 후궁을 맞이했는데, 가장 많이 둔 왕은 태종으로 19명을 두었다. 그 뒤를 이어 광해군 14명, 성종 13명, 고종 12명, 연산군과 중종은 각각 11명의 후궁을 두었다. 반면 현종, 경종, 순종은 1명도 두지 않았는데, 모두 병약한 체질이라고 알려져 있다. 순조(1명), 단종·헌종(2명), 인종·효종(3명), 인조·영조·정조(4명)도 평균보다 적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조선 초기엔 7.5명, 중기엔 6.8명, 후기엔 3.5명으로 갈수록 후궁의 수가 감소했다. 
 『조선왕실의 후궁』 표지 [사진 지식산업사]

『조선왕실의 후궁』 표지 [사진 지식산업사]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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