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부 학폭 충격 통계…피해 40%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

중앙일보

입력 2021.02.15 17:03

업데이트 2021.02.15 17:21

지난해 10월 경기에 출전한 이재영과 이다영(왼쪽).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경기에 출전한 이재영과 이다영(왼쪽). 연합뉴스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좀 때려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게 없으면 성적 내기가 힘들죠.” - 고교생 남자 야구선수

“선배들도 이렇게 했으니까 저희도 이제 그냥 자연스럽게 되더라고요. 운동하는 사람들은 처맞아야지 정신을 차립니다.” - 중학생 남자 양궁선수

“코치님에게 맞는 이유는 제대로 하지 않아서 맞는 것이기 때문에 맞는 건 상관없어요.” - 초등생 여자 태권도선수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초·중·고교 학생 선수 6만여 명을 전수조사했을 때 나온 학생 선수들의 말이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였던 조재범의 선수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조사였다. 설문과 심층인터뷰를 통해 진행된 당시 조사에서 학생 선수들의 피해 사례와 구조화된 폭력의 단면이 드러났다.

최근 여자 프로배구 이재영·다영(25) 쌍둥이 자매가 저지른 학교폭력 폭로를 계기로 운동선수들의 학폭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일선 학교에선 학생 선수들이 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복 두려워 소극적

국가대표와 프로선수를 꿈꾸며 학교 운동부에 소속돼 훈련을 받는 학생 선수들의 폭력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인권위의 2019년 조사(전국 5274개교 초·중·고 선수 6만3211명 대상)에서도 응답자의 14.7%(8440명)는 코치나 선배로부터 신체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폭언이나 욕설, 협박 등 언어폭력은 15.7%(9035명)를 차지했으며 초등학생의 피해사례가 가장 많았다. 신체폭력은 학년이 높아질수록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 고등학생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다영의 학폭 관련 자필 사과문 [흥국생명]

이다영의 학폭 관련 자필 사과문 [흥국생명]

신체폭력을 당한 학생 선수 중 응답자의 79.6%(4898명)는 피해를 주변에 알리거나 신고하지 않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그 이유에 대해 학생 선수들은 ‘보복이 두려워서’(24.5%). ‘대처방법을 몰라서’(13.0%) 등을 꼽았다.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로부터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 역시 “10년이나 지난 일이라 잊고 살까도 생각해봤다. 그때의 기억이 스치면서 자신을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 내서 쓴다”며 자신이 당했던 학교폭력을 뒤늦게 폭로했다.

‘폭력 피해의 내면화’

전문가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체육계 폭력의 원인 중 하나로 ‘폭력 피해의 내면화’를 꼽는다. 정혜원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15일 “학교 운동부는 일반적인 사회 집단보다 폭력이 허용되는 수준이 높은 조직 문화를 지니고 있다”며 “운동부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합숙훈련을 하고 단체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폭력이나 통제에 순응하거나 자신 역시 폭력의 가해자로 역할하게 되는 이른바 폭력의 사회화 과정이 이뤄지기가 쉽다”고 지적했다.

인권위 조사에서 초등학생 선수들은 신체폭력을 경험한 뒤 감정을 묻자 38.7%(898명)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함”이라고 답했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인권위는 “일상화된 폭력 문화 속에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미 폭력을 훈련이나 실력 향상을 위한 필요악으로 인식한다”며 “이러한 폭력의 내면화는 운동집단 내 폭력 문화가 지속, 재생산되는 악순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에이스 눈치 보기,코치의 묵인이 피해 키워

전문가들은 체육계의 폭력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선 엘리트 중심의 체육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아무리 반인륜적인 행동을 해도 경기 실적이 좋으면 용서되고, 금메달을 따면 모든 면죄부가 주어지는 이른바 엘리트 스포츠의 관행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팀 에이스에 대한 눈치 보기와 지도자의 묵인 아래 폭력이 광범위하게 이뤄져 왔고 지금 드러난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번 이슈가 학폭으로 논란이 된 몇몇 선수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에 그칠 것 같아 염려된다”며 “엘리트 체육의 관행이 근절되지 않는다면 학생 선수들 간의 폭력은 여전히 수면 아래에서 횡행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체육계의 조직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지도자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혜원 연구위원은 “학교 운동부는 군대와 같은 위계와 서열, 권력과 통제, 복종의 규범이 작동하는 집단적 특성을 지니기 쉽다”며 “안전하고 차별 없이 운동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코치들의 노력이 필요한 만큼 이에 대한 교육법이 제대로 전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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