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이야기] 통풍환자도 채소 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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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풍(痛風)이란 병이 있다. '고통의 바람'이란 한자어 그대로 살갗이 불에 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바람처럼 발작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주로 엄지 발가락이 발갛게 붓기 시작하면서 나타나지만 악화하면 발목 등 다른 관절로 옮겨갈 수 있다. 대개 며칠 지나면 좋아지지만 재발하기 일쑤며 심한 경우 관절에 영구적인 손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관절 안에 요산(尿酸) 결정체가 마치 뾰족하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쌓이면서 염증을 유발하고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원인이다.

요산은 퓨린이란 물질이 체내에서 제대로 대사되지 못할 때 생성된다. 그리고 퓨린은 육류와 생선에 다량 함유돼있다. 특히 고등어와 정어리 등 등푸른 생선에 많다. 대개 등푸른 생선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통풍만은 예외다. 이들 식품을 많이 섭취할 경우 신진대사 과정에서 퓨린이 많이 생성되고 이로 인해 관절 속에 요산도 많이 쌓이기 때문이다.

통풍이 대표적 부자병으로 알려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요산의 원료물질인 퓨린이 육류에 많이 함유돼 있고 통풍의 염증을 악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바로 술이기 때문이다. 산해진미랄까.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육류와 음주 소비량이 늘어나므로 통풍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환자 숫자도 날로 늘어나 미국에서만 현재 500만여명이 앓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수만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최근 통풍과 관련해 매우 의미있는 연구결과가 한국인 과학자에 의해 발표됐다. 주인공은 미국 하버드대 의대 매사추세츠종합병원 류머티즘 내과의 최현규 박사다. 최박사는 1986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90년 도미, 임상역학으로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밝혀낸 업적은 통풍과 식사습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지금까지 통풍환자들의 금과옥조는 앞서 언급한 대로 '가능하면 퓨린이 많이 든 식품을 삼가라'였다. 퓨린은 육류와 생선에도 많지만 콩과 버섯.시금치.귀리.컬리플라워 등 채소에도 많다. 따라서 지금까지 의사들은 이들 고퓨린 함유 식물의 섭취도 삼가야 한다고 환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최박사의 연구 결과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최박사팀은 통풍이 없었던 건강한 미국인 4만7150명을 대상으로 12년 동안 관찰했다. 관찰 도중 이들에게서 모두 730명의 통풍환자가 발생했다. 연구진은 통풍이 발생한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 간 식사습관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저지방 우유나 요구르트 등 낙농제품이 통풍을 예방하며 시금치.콩.버섯 등 퓨린 성분이 많은 채소는 먹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통풍과 식품 간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명한 최초의 연구다. 최박사의 연구결과는 의학분야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미국의 의학잡지 NEJM 최신호에 게재됐다.

연구진은 음식의 섭취량에 따라 5개 그룹으로 나눠 음식 섭취와 통풍 발병과의 상관 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저지방 우유나 요구르트 등 저지방 유제품을 가장 많이 먹는 상위 20% 그룹은 가장 적게 먹는 하위 20% 그룹에 비해 통풍 발병률이 44%나 낮았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등 육류를 가장 많이 먹는 상위 20% 그룹은 가장 적게 먹는 하위 20% 그룹에 비해 통풍 발병률이 41% 높았고, 또 생선을 가장 많이 먹는 상위 20% 그룹은 하위 20% 그룹에 비해 통풍 발병률이 51%나 높았다.

하지만 콩과 버섯.시금치 등 퓨린이 많은 채소는 예상과 달리 통풍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전체적인 단백질 섭취량도 통풍과 관련이 없었다. 그러니까 단백질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육류와 해산물 등 단백질의 종류가 문제였던 것이다. 퓨린핵산이 많은 채소가 해롭다는 통풍 관련 기존 지식은 이제 의학 교과서에서도 폐기돼야 할 처지가 됐다.

이처럼 첨단의학의 시대엔 어제의 진실이 오늘은 거짓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료진이나 언론은 물론 환자도 자신의 질병에 관한 한 첨단의학의 흐름을 주시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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