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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집 비번 푼 남성…"위아래" 재판부는 퍼즐처럼 풀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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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아파트에서 도어락을 여는 모습. 기사의 내용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아파트에서 도어락을 여는 모습. 기사의 내용과 관련 없음. [연합뉴스]

“피고인의 비밀번호는 ‘ABCD’로 손을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면서 A·B·C를 순차로 누른 후 대각선 왼쪽 아래 방향으로 손을 움직여….”

아래층에 사는 여성의 집 출입문 비밀번호 4자리를 누르고 들어가려다 주거침입미수 혐의로 기소된 한 20대 남성 A씨에 대한 판결문 일부다. 지난 2019년 7월, 서울 강북구에 있는 한 다가구주택(빌라) 3층에 거주하는 A씨는 자신의 아래층인 2층에 거주하는 B씨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당시 A씨는 B씨가 집에 있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사건추적] 재판부, 퍼즐처럼 풀어내 #“‘공교롭게 열렸다’는 주장 믿기 어렵다”

“지로용지 보며 계단 오르다 착각”

재판에서 A씨는 당시 우편물함에서 꺼낸 가스요금 고지서(지로용지)를 보며 계단을 올라가다 층수를 헷갈려 B씨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착각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현관문 앞에서도 계속 지로용지를 보며 평소처럼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공교롭게 현관문이 열렸다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이때 재판부는 피고인의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인 A·B·C·D와 피해자의 비밀번호인 D·B·C·A를 두고 손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이어 “피고인과 피해자의 주거지 도어락 비밀번호는 A·B·C·D로 구성은 같지만, 그 순서가 다른 번호로 실제 비밀번호를 누를 때 손의 움직임(이동 경로)이 전혀 겹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어 “피고인의 주장처럼 피고인이 도어락을 보지 않고 비밀번호를 눌렀다면 평소 습관대로 손을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그와 전혀 다른 움직임이 필요한 피해자의 주거지 도어락의 비밀번호가 눌러져 현관문이 열렸다는 것은 경험칙상 도저히 믿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재판부 “경험칙상 도저히 믿기 어려워”

A씨가 가스요금 지로용지를 보면 계단을 올라갔고, 용지를 보면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고 주장한 데에 대해서 재판부는 “당시는 하절기 일몰 무렵으로 건물의 구조, 창문의 위치와 형태 등에 비추어 계단과 복도가 어두운 상태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도 “계단과 복도에 센서등이 설치돼 있지만, 경험칙상 무엇인가를 보면서 이동할 경우 통상 걸음이 느려지는 점을 고려하면 피고인이 계속 지로용지를 읽으며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연속적으로 센서등이 켜진 상태가 유지됐을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여기에 A씨의 진술이 수 차례 번복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단순 실수라면 사정 설명했어야”

재판부는 A씨의 태도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주장과 같이 피고인이 단순 실수로 피해자의 현관문을 연 것이라면 얼마든지 피해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피고인은 경찰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피해자 현관문 앞에 자신의 인적사항을 밝히지 않은 편지와 음료수를 두고 여행을 떠나는 등 자신의 행위를 단순 실수로 인식하는 사람의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서울북부지법 형사8단독 김영호 판사는 이 같은 이유로 A씨에게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보호관찰을 명령했다.

정희윤 기자 chung.he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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