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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한 친구에게 슬쩍 다른 친구 험담했다면 명예훼손?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용우의 갑을전쟁(32)

한 번쯤은 명예훼손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을 겁니다. 유명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포스팅한 글 때문에 구설에 오르거나 곤욕을 치르는 일은 이제 생소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명예훼손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명예훼손 침해가 광범위해지고 이로 인해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1953년 제정된 우리 형법은 ‘공연히 사실 또는 허위의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형법 제307조).‘공연성’을 판단하기 위해 우리 법원은 1968년 최초로 ‘전파가능성 이론’을 채택한 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전파가능성 이론’이란 개별적으로 한두 명의 소수에게 말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이를 전파할 수 있다면 공연성이 인정된다는 말입니다.

최근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과 보편화로 SNS, 이메일, 포털사이트 등 정보통신망을 통해 대부분의 의사표현·전달이 이루어지고 있어 명예훼손 사건이 폭증하고 있다. [사진 unsplash]

최근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과 보편화로 SNS, 이메일, 포털사이트 등 정보통신망을 통해 대부분의 의사표현·전달이 이루어지고 있어 명예훼손 사건이 폭증하고 있다. [사진 unsplash]

예를 들어, A가 불특정 또는 다수의 인파가 모인 장소에서 ‘X는 전과자다’라고 크게 얘기했다고 합시다. 당연히 공연성이 있고 이때는 명예훼손이 적용됩니다. 그런데 A가 B에게만 슬쩍 ‘X는 전과자다’라고 얘기했다면 어떨까요. 이럴 때는 따져봐야 합니다. 만약 B가 X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라면, X의 치부를 굳이 여러 군데 말하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 전파가능성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B도 평소 X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었다면 이때다 싶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수 있겠지요. 전파가능성이 인정될 겁니다.

최근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과 보편화로 SNS, 이메일, 포털사이트 등 정보통신망을 통해 대부분의 의사 표현·전달이 이루어지고 있어 명예훼손 사건이 폭증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50년간 유지해 온 ‘전파가능성 이론’을 폐지할지에 대해 14명의 대법관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고민도 했지요. 하지만 ‘전파가능성 이론’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 났습니다(대법원 2020. 11. 19. 선고 2020도5813 전원합의체 판결).

A와 X는 이웃이었지만 여러 문제로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건 당일 A는 X의 집 뒷길에서 X와 말다툼을 하면서, ‘저 사람(X)이 징역 살다 온 전과자다’라고 크게 소리쳤고, 인근에 있는 B가 이 말을 듣게 됐습니다. 대법원은 전파가능성 이론에 따라 A의 행위가 명예훼손이라고 봤습니다. A의 변호인은 사건이 일어난 곳은 집성촌으로 B와 X가 서로 같은 성 씨이기 때문에 전파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B와 X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고, A가 공개된 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해 다른 마을 사람들도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예훼손의 ‘공연히’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세상에서 다 알 만큼 뚜렷하고 떳떳하게’라는 뜻이기 때문에 행위 자체가 공연히 이루어지지 않는 명예훼손은 처벌 대상이 아니다.[사진 pixabay]

명예훼손의 ‘공연히’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세상에서 다 알 만큼 뚜렷하고 떳떳하게’라는 뜻이기 때문에 행위 자체가 공연히 이루어지지 않는 명예훼손은 처벌 대상이 아니다.[사진 pixabay]

대법원의 다수 견해는 전파가능성 이론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일단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 있는 글을 정보 통신망에 올린 순간부터 통제하기 만만치 않고, 빠른 전파성으로 명예훼손의 침해 정도가 훨씬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한 겁니다. 명예훼손 사건의 처벌범위가 확대되는 것 자체를 경계하자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전파가능성 이론 자체를 폐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대법원은 전파가능성이 인정되더라도 해당 발언이 공정한 비판이라면 가능한 한 처벌은 지양해야 한다며 형법 제310조를 확대하자고 했습니다. 형법 제310조는 사실을 적시한 명예훼손의 행위가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면 처벌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전문 용어로는 위법성조각사유라고 합니다). 대법원은 이 규정을 넓게 적용해서, 전파가능성 이론에 따라 공연성이 있는 발언이라도, 그것이 타인에 대한 공정한 비판이라면 가급적 처벌하지 말자고 한 겁니다.

3명의 대법관은 이마저도 반대했습니다. 아예 전파가능성 이론을 폐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명예훼손의 ‘공연히’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세상에서 다 알 만큼 뚜렷하고 떳떳하게’라는 뜻이기 때문에 행위 자체가 공연히 이루어지지 않는 명예훼손은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앞선 예시로 든 A가 B에게 은밀하게 X가 전과자라고 이야기한 것이 어떻게 공연한 것으로 볼 수 있냐고 반문한 겁니다. 전파 가능성은 결국 전파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가능성만 가지고 처벌을 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반할 뿐 아니라 처벌 범위가 부당하게 확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각각의 해법은 다르지만, 다수 의견과 반대 의견은 모두 명예훼손이 급증해 건전한 자정 작용마저 위축되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향후 명예훼손으로 실제 처벌로 적용되는 사례는 점차 줄지 않을까 전망도 나옵니다.

법무법인(유한) 바른 변호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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