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읽기] 더운 밥상 꿈꾸는가, 찬밥 남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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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나를 존중할 순 없을까. 결혼 생활 18년째인 K씨(47)가 요즈음 골몰해 있는 생각이다. 발단은 달포 전 아이들과 함께한 저녁식탁.

학원 순례로 바쁜 아이들과 함께 오랜만에 식사를 하려던 그는 무심코 식탁에 놓인 반찬들을 보고는 마음이 상했다. 큰 생선토막도, 자신이 좋아하는 장조림과 찌개도 아이들 쪽에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순간 무시당한 느낌을 받은 그는 "내 생선이 가장 작네…"라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아내는 대뜸 "한창 자랄 아이들이 잘 먹어야 한다"며 "유치하게 자식한테 먹을 것 가지고 샘낸다"고 핀잔을 줬다. 자신을 빤히 쳐다 보는 아이들 보기 민망해 지나쳤지만 그때부터 K씨는 내내 언짢고 우울하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밤참을 '공부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만든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문득 자신의 투정이 '간 큰 남자'의 행동이었나 싶기도 하다. 그간 큰 돈은 못 벌어도 월급은 늘 아내 차지였는데…. K씨는 지금도 이러니 은퇴 후엔 더 한심한 처지가 될 게 뻔하다고 하소연한다.

비단 K씨뿐이랴. 한때 노래로도 불리던 '간 큰 남자' 시리즈는 이 시대 소시민 가장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아내에게 아침 차리라고 보채거나, 용돈 적다고 투덜거리면 간 큰 남자라는 것이다. 과장된 면이 있지만, 상당 기간 남성들의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회자될 만큼 '초라한 가장'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유머였다.

과연 이 시대 아버지들은 이전과 같은 가장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일부에서 '가장 기(氣) 세우기 운동' 같은 노력도 있었지만 별 효험은 못 본 것 같다. 왜일까.

전통사회의 가장은 바깥 세상을 독점하면서 얻은 정보와 경제력으로 가정내에서 절대권력을 누렸다. 반면 21세기 한국은 정보와 경제력을 누구나 재주껏 공유하는 사회다. 시대적 상황 자체가 가장의 권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아버지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내가 선의(善意)를 베풀기만 마냥 기대하는 것은 너무 답답하고 서럽다. 약간의 시위(?) 효과도 노릴 겸 가장이 먼저 스스로를 대접해보면 어떨까.

주눅든 목소리로 밥 달라고 부탁만 하지 말고 손수 밥상을 차리거나, 아예 나가서 사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용돈이 적다면 한번쯤 필요한 액수만큼 월급에서 떼내고 아내에게 주는 '모험'도 해봄직하다. 뭐든지 아내에게 매달리는 남편도, 가장이 벌어온 돈에 밴 땀냄새를 잊어버린 아내도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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