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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일상에 스며든 예술 ‘마을가게미술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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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화되고 전시장이 휴관과 개관을 반복하면서 박물관들은 비접촉 전시 시스템 구축을 위해 첨단기술의 사용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온라인 전시 기술이 늘면 늘수록,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이 묻어나는 실제 공간에서 예술품을 보고 느끼고 싶은 욕망 또한 커져 간다. 서울 남가좌동 일대의 구둣방, 옷 수선소, 떡집, 사진관 등 20여 곳을 전시장으로 삼은 ‘마을가게 미술관’ 공공예술 프로젝트(후원 아르코, 주최 (사)아이공)를 통해 동네 주민들은 물건을 사거나 가게의 쇼윈도를 보면서 선물처럼 삶 속으로 찾아온 영상예술을 만날 수 있다(1월 23일까지).

남가좌동 증가로 주변은 백련 전통시장과 오래된 가게들이 즐비하지만, 재개발의 위협을 안고 있는 지역으로, 이번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에 예술이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미디어 아티스트와 영화감독 37인은 짧게는 1분여에서 10분 내외의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을 통해 환경과 인권, 노동과 자본 등의 주제를 실험적이고 참신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정기현, 아름다운 마을, 2010년, 싱글채널 비디오. [사진 프로젝트추진단]

정기현, 아름다운 마을, 2010년, 싱글채널 비디오. [사진 프로젝트추진단]

공력이 돋보인 작품으로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발자취를 따라 그 후손들을 만나고, 처형당한 여성혁명가 김 알렉산드라와 ‘동방의 레닌’이라 불렸던 김 아파나시의 삶을 추모하는 ‘눈의 마음 (김소영)’을 꼽을 수 있다. 흑백 옛 기록 필름과 흑백의 설경이 교직되면서 아픈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엮어냈다.

‘아름다운 마을(정기현)’은 곤충 크기로 줄어든 인간이 쓰레기더미 위에서 닭과 개의 위협 속에 살아간다는 기발한 상상력을 이미지화한 작품으로 동물과 생태계의 시점에서 세상을 뒤집어 보았다. ‘나방채집기(유소영)’는 인터뷰 노동자들을 열감지 카메라로 찍고 이를 나방의 반복적 날갯짓과 병치시킴으로써 현대사회에서의 노동과 숨겨진 욕망을, 불을 찾아 날아드는 나방의 관성에 빗댔다.

‘꿩 잡는 게 매다(김홍빈)’는 철공소들이 철거되고 아파트가 숲을 이룬 문래동에서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자본의 횡포를 백열전구에 골프채를 휘두르는 퍼포먼스로 은유함으로써, 유사한 상황에 놓인 남가좌동 일대 상점의 미래를 연상하게 만든다. 흑사병이 지나고 르네상스가 도래했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 다다이즘이 탄생했듯, 팬데믹 이후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미래학자들은 예측한다.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을 손상시켰지만, 무시되고 왜곡돼왔던 일상의 현주소 역시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영상들은 접힌 역사 속에 숨어 있던 삶의 편린들을 끄집어냄으로써 작고 소박한 일상이 쌓여 이룩된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팬데믹 시대의 예술 역시 욕망에 함몰됐던 일상성을 올곧게 드러냄으로써 회복될 미래에 대한 건강한 꿈을 선취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