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정재의 시시각각

실록에 비추다① 재정을 □ 쓰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07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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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연산군 9년(1503년) 2월 19일, 이런 일이 있었다. 대간들이 시사(時事) 10조목을 상소했다. 시사 10조목은 ‘임금이 해야 할 시급한 일 10가지’다. 연산은 조선왕조 500년 사상 가장 강한 왕권을 행사한 왕으로 꼽힌다. 연산에게 올리는 상소야말로 목숨을 건 간언이었을 것이다. 그 셋째 조목이 ‘재정을 쓰는 것(財用)’이었다. 얼마나 연산이 나라 살림을 허투루 썼으면 그런 상소를 올렸을까. 하기야 흥에 겨워 나랏돈을 마구 쓴다는 의미의 흥청망청이란 말이 연산이 만든 흥청(興淸)에서 나왔을 정도니 재삼 무슨 말을 덧대랴. 이긴 자의 기록이라 연산의 공은 깎고 과는 부풀렸음을 고려해도 조선왕조실록은 재용의 반면(反面) 사례로 연산을 콕 짚어 적고 있다. 3조목을 간략히 옮기면 이렇다.

“재물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
흥청망청 쓰면 재물을 손상하고
재물이 손상되면 백성을 해쳐”

‘재용(財用)을 절약해야 합니다. (중략) 대체로 재물이라는 것은 백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쓰면 재물을 손상하고, 재물을 손상하면 반드시 백성을 해치게 됩니다. 옛 임금은 검소하고 절용하여 비용을 쓰는 데 제도가 있어서 수입을 계산하여 지출했으므로, 홍부관후(紅腐貫朽:곡식과 돈이 남아 썩을 정도)의 효과가 있었는데, 이와 반대되면 국고가 텅 비게 되는 걱정이 생길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국가에서 근년 이래로 비용이 점점 늘어나고 하사해 주는 것이 절도가 없어서 한 해의 비용이 얼마인지를 모릅니다. 그리하여 관사(官司)의 비축된 것과 세금 거둔 것으로는 공급하지 못하는 폐단이 많이 있어서, 후년 것을 당겨 미리 납부하라는 명령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래서야 국가의 비축이 어찌 충족될 것이며 민생이 어찌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중략)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곡식도 백성의 고혈(膏血)이 아닌 것이 없고 보면, 임금된 분으로 함부로 소비해서 재물을 생산하는 근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해쳐서 나라의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비록 구제하려고 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전하께서는 어찌 살피지 않으십니까?’

그로부터 500년쯤 흘러 문재인 정부 4년엔 이런 일이 있었다. ‘재용’을 책임진 장관이 “국가채무비율은 40%로 본다”고 하자 대통령이 “우리나라만 40%인 근거가 뭐냐”고 되물었다. 장관은 입을 다물었고 대통령은 마음껏 재용을 풀었다. 수입을 계산해 지출하지 않았으며 모자라면 내년, 내후년 것을 당겨 썼다. 가계빚은 1700조원을 넘어섰고 나랏빚은 900조원까지 치솟았다. 그런데도 3차 지원금의 보따리도 아직 안 풀었는데 전 국민에게 4차를 또 주려고 한다. 그리되면 국가채무비율은 50%까지 올라설 것이다. 국고가 텅 비게 생겼는데도 나랏빚을 걱정하거나 아껴 쓰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선거용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어디 그뿐이랴. 인구는 줄어드는데 공무원은 9만 명을 늘렸다. 마을 곳곳에 할 일이 없어 시간만 축내는 공무원이 널렸음에도 17만4000명을 늘리겠다는 공약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국민 편익을 위한다지만 그 대신 국민이 짊어져야 할 부담은 30년간 적게는 약 328조원(국회예산정책처 추계)에서 많게는 419조원(한국납세자연맹)에 달한다. 공무원이 한 명 늘면 민간 일자리가 1.5개 준다는 통계도 있다. 늘어난 공무원은 국민의 ‘등골 브레이커’가 될 것이다. 500년 전 연산이 관기(官妓)인 흥청을 1000명으로 늘릴 때도 말은 백성을 위한다며 “잔치를 베풀어 태평성대를 누리라”고 했다.

후세 사가들이 이르기를 “연산이 흥청망청 나라 살림을 탕진하지 않았다면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기록됐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대통령이 보여야 할 모범도 같은 이치다. 힘이 있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으뜸이다. 제 편과 권력을 위해 재정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게 그중 하나다(※ □에 들어갈 말을 고른다면? ①정의롭게 ②흥청망청 ③함부로 ④답 없음.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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