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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팬덤 정치의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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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해 12월 30일 828m로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외벽 전면에 방탄소년단 멤버 뷔의 생일 축하 메시지가 걸렸다. 큰손으로 유명한 중국 팬클럽의 선물이다. 부르즈 칼리파 외벽 광고는 삼성, 소니 등 글로벌 브랜드, 두바이 왕실 광고나 허용되던 곳이다. 과시성 축하를 뭘 저렇게까지라고 삐딱하게 볼 수도 있지만, 방탄의 팬이라는 게 자기정체성의 하나가 된 시대다. 어디 이뿐인가. 서울 지하철 곳곳에 무수한 아이돌 응원 광고가 붙어 있다. 누구에겐가 몰입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의 초상이다.

광신과 맹목의 대통령 열혈 팬덤 #민주주의 훼손, 공멸의 길 자초 #차라리 아이돌 팬 문화를 배우라

K팝은 팬덤을 동력 삼아 성장해 왔다. 초기엔 ‘빠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라이벌 팬클럽과 몸싸움을 불사하는 폭력적 양태도 있었다. ‘양육자’ 팬덤이 자리 잡으면서 팬 문화가 진화했다. 스타의 성장을 내 성장과 동일시하고 내가 스타를 키운다는 인식이 퍼졌다. 팬들의 진상 짓으로 대중의 호감을 잃거나 신규 팬의 유입을 막는 것이 최악의 금기가 됐다. 팬은 스타의 얼굴이니 매너 장착은 필수. ‘팬질’에 선행과 기부가 추가됐다.

물론 여기도 청정지대는 아니다. 팬덤의 입김이 세지며 기획사에 도 넘는 훈수로 눈총받는 일이 생겼다. 국내외 팬덤 간 민족적·인종적 갈등도 커졌다. 일부 악성 팬은 어디서든 ‘박멸’이 어렵다. 하지만 큰 팬덤일수록 자정 능력이 강하다. 내 가수를 위한 ‘영업’(팬 모으기)은 기본. ‘팬덤이 싫어서 가수가 싫다’는 얘기는 듣지 말자가 모토다.

이에 비견되는 것이 정치 팬덤, 팬덤 정치다. ‘노사모’ 등 정치인 팬클럽이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에 와서 아이돌식 팬 문화가 본격화했다. 대선 기간 중 각종 굿즈가 등장했고, “우리 이니 하고픈 거 다 해”라는 ‘닥치고 지지’가 뿌리내렸다. ‘문파’의 핵심층에 아이돌 팬클럽 출신이 상당수 유입됐다는 분석도 있다.

아이돌 팬덤이 K팝 한류를 이끈 것과 달리 팬덤 정치는 연일 정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주범으로 비판받는다. 대통령에 대한 눈먼 사랑으로 정당한 지적에도 문자폭탄, 악플테러를 일삼는 강성 친문 지지층의 행태가 그렇다. 대통령은 이를 “경쟁을 흥미롭게 하는 양념”이란 말로 추인해 줬다. 최근 여권 인사들이 ‘윤석열 탄핵론’ 등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주장을 내놓는 배후에도 이들의 문자폭탄이 있다는 분석이다.

극소수 ‘빠’만 보고 가는 정치, 홍위병 수준으로 전락한 팬덤. 국민 여론과 담 쌓고 서로만 환호하는 자폐적 팬 문화. 이건 팬을 늘리는 게 아니라 있던 팬도 떨어져 나가게 하니, 팬덤 정치란 말이 아까울 정도다. ‘편’덤 정치라면 모를까. 악성 팬들 때문에 스타는 망하면 그만이지만 비이성적 팬덤 정치의 결과는 스타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훼손, 정치의 후퇴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한 강의에서 “문빠 문화가 아이돌 팬 문화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랑이 상대에 대한 존중과 내가 성장하는 동력이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불만과 좌절, 약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셀럽을 매개로 분풀이하는 문화가 됐다”며 “(문빠의 사랑은) 상대방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 팬을 모으기는커녕 기존의 지지자조차 쫓아내고 있다. ‘문빠’나 ‘박사모’나 행동과 사고방식은 똑같다”고 꼬집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신간 『싸가지 없는 정치』에서 “문재인 정권은 문빠의 덕을 볼 수 없는데, 내부에서 이걸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단기적일망정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문빠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 게 현실”이라며 “문빠의 상당수도 대통령이 자신들의 덕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지만 잠재적 지지자들을 쫓아내는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과는 아마도 공멸일 것이다.

다시 방탄 뷔로 돌아가자면, 뷔의 전 세계 팬들은 생일 기념 기부 릴레이를 경쟁하듯 펼쳤다. 좋아하는 스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는 아이돌 팬질의 의미를, 새해 아침부터 실천 중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