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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코너 몰리면···'선박 나포'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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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수비대가 4일(현지시간) 환경오염을 이유로 한국 국적의 유조선 ‘MT한국케미호’를 나포한 것은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도발 행위로 풀이된다.

이란은 2018년 5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핵 합의를 일방 탈퇴함에 따라 대이란 제재가 대부분 복원된 상태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 국적 유조선에 대한 나포는 출범 준비 중인 조 바이든 행정부에 핵 합의 협상 테이블에 복귀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이란의 원유 수출 대금 70억 달러(약 7조5700억원)를 시중 은행을 통해 동결하고 있어 나포 대상으로 한국의 유조선을 선택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다만 이란 외무부는 “이 사안은 완전히 기술적인 조치이며 해양오염 조사하라는 법원 명령 따른 것”이라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란의 '나포 활용법' 

이란은 과거에도 외교·군사적 갈등 상황에서 타국 선박에 대한 나포·억류를 보복의 무기로 활용해 왔다. 지난해 8월 17일 이란 국경경비대가 영해 침범을 이유로 아랍에미리트(UAE) 선박 한 척을 나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란 외무부는 “UAE 해안경비대가 이란 어부 2명을 사살하고 어선 1척을 나포했다”며 UAE 선박에 대한 나포는 이에 대한 보복 조치임을 시사했다.

 ①UAE 선박 나포, 이스라엘과 평화협약 반발

하지만 그 이면엔 나포 나흘 전 UAE가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평화협약을 체결한 데 항의하는 차원으로 이란이 선박 나포를 활용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수니파 국가인 UAE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약을 체결할 경우 자연스럽게 시아파 맹주인 이란에 대한 견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 이란 외무부는 협약 체결 직후 성명을 통해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과 UAE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강하게 규탄한다. 이 합의는 팔레스타인과 모든 무슬림의 등에 칼을 꽂는 짓”이라고 반발했다.

이란‘영국 유조선’억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란‘영국 유조선’억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란 혁명수비대는 2019년 7월 19일엔 영국 유조선 스테나 임페로호를 나포하며 긴장감을 유발했다. 당시에도 이란은 “영국 유조선이 선박자동식별장치를 끈 채로 불법 해로를 이용해 운항했고, 그 과정에서 이란 어선과 충돌했음에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며 나포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역시 대외적 명분일 뿐 실제로는 미국·영국에 대한 군사·외교적 반발 조치로 나포를 활용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②영국 유조선 나포, 전날 무인기 피격 

이란 혁명수비대가 영국 유조선을 나포하기 전날 미국과 이란은 호르무즈해협에서 서로 상대의 무인정찰기를 격추하며 군사적 긴장감을 높였다. 특히 같은 해 4월 영국 해군은 이란의 유조선이 EU의 시리아 제재를 어기고 원유를 시리아로 밀반입하려 한다는 이유로 나포해 핵 개발 갈등을 둘러싸고 미국·유럽 대 이란·러시아의 대결 구도가 뚜렷해지던 상황이었다. 이란은 영국 유조선 나포 9일 전인 7월 10일엔 이란 혁명수비대의 무장 선박 세 척이 영국 유조선을 나포하려다 영국 해군 군함과의 대치 끝에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③인도 유조선 '해양오염' 나포, 실제론 '원유 보복' 

2013년 8월 13일 이란이 공해 상에서 원유 14만톤을 싣고 가던 인도 유조선 MT데슈샨티호를 나포한 것은 이번 한국 유조선 나포와 가장 유사한 사례다. 당시 이란 당국은 “인도 유조선이 이라크로 가기 위해 이란 영해를 지나던 도중 기름이 섞인 선박 평형수를 쏟아내 광범위한 해양 오염을 일으켰다”며 100만 달러(약 10억8600만원)의 보상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해당 선박의 선사인 '쉽핑 코퍼레이션 오브 인디아(SCI)' 측은 출항 전 선박 평형수에 대한 조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에선 이란의 유조선 나포를 ‘보복성 조치’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당시 이란은 핵 프로그램 개발에 따른 제재로 원유 수출이 제한된 상태였는데, 전통적인 우방인 인도가 이란의 원유수입을 줄이고 이라크 원유수입을 늘리자 앙심을 품고 유조선을 나포했다는 분석이었다.

‘이란, 한국선박 나포’ 한국-이란-미국 관계.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란, 한국선박 나포’ 한국-이란-미국 관계.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란의 이같은 ‘나포 활용법’은 양국의 군사적 긴장감만 높일 뿐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핵개발 및 제재 위반 등 명백한 자국 과실에 대해 공식 항의를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선을 나포·억류하며 불만과 분노를 표출할 뿐이었다.

이번 MT한국케미호에 대한 나포 역시 미 국무부가 “이란 정권은 국제사회의 제재 압력 완화를 얻어내려는 명백한 시도의 일환으로 페르시아만에서 항행의 권리와 자유를 계속 위협하고 있다”는 입장을 발표하는 등 미국-이란 간 관계를 악화시키는 모양새다. 한국 정부 역시 한국케미호와 선원의 조기 억류 해제를 요청하고 청해부대 소속 최영함을 호르무즈 해협 인근으로 긴급 출동시켰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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