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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치열한 시행착오 축적 없인 혁신 기술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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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표준의 탄생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딱 1년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에서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기술경쟁의 현장을 둘러보던 중 운 좋게도 조용히 자율주행 시스템을 개발해온 퀄컴의 테스트용 차량을 시승할 수 있었다. 자동차가 사람처럼 ‘눈치’를 본다는 낯선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 진입로에 들어설 때 왼쪽 뒤에서 달려오는 차를 보고 속도를 조절해가며 ‘밀당’하는 느낌이나, 옆 라인의 차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면서 가까이 다가올 때 소심하게 차선 변경을 ‘자제’하는 느낌은 분명 생소한 체험이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과 기계라는 주어와 목적어 관계가 역전되면서 이런 느낌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상이 올 것이다.

그간 축적 건너뛰고 압축적 발전 #세계는 지금 표준 위한 기술전쟁 #끈질긴 축적의 시간 거쳐야 #미래시장 지배권 거머쥘 수 있어

게임의 룰 바꾸는 혁신기술 등장

지난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 2020에서 관람객들이 현대차 부스의 개인용 비행체(PAV) 콘셉트 ‘SA1’을 살펴보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 2020에서 관람객들이 현대차 부스의 개인용 비행체(PAV) 콘셉트 ‘SA1’을 살펴보고 있다. [EPA=연합뉴스]

산업의 종류를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게임의 룰을 바꾸는 혁신적 기술들이 등장하고 있다. 2015년 말 미국의 위성발사기업 스페이스X는 위성을 발사하면서 1단 추진체를 회수하는 놀라운 기술을 역사상 최초로 성공시켰다. 작년 11월에는 마침내 유인우주선을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보내면서 동시에 1단 추진체를 정해진 자리에 착륙시키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이 재활용 로켓이라는 개념설계가 안정화된다면, 기존보다 최소 10분의 1 이하의 비용으로 발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날로 커지는 우주산업에서 새로운 표준이 탄생하는 것이다. 집콕 덕분에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안방을 장악하면서 텔레비전과 영화 등 기존 미디어 산업의 표준 역시 깨지고 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전통의 기술강국인 독일·일본 기업들도 새로운 차원의 기술을 내어놓기 바쁘고, 게다가 따라잡기 시대는 끝난다고 선언한 중국의 대표기업들도 질세라 인공지능 등 첨단분야에서 중국발 표준을 제시하면서 글로벌 기술경쟁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기술전쟁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이 경쟁의 본질은 혁신적 개념설계로 업의 본질을 재정의하고 새로운 시장을 열어가는 것이다. 누구의 기술이 표준이 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기술 챔피언들 간의 한판 승부에서 승리의 보상은 미래 시장의 지배권이다. 혁신적 기술로 표준이 바뀌면 기존 게임의 룰에서 그저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존하던 기업들은 소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한때 유행했던 책 제목처럼 평생 없어지지 않을 것 같던 내 치즈를 누가 어느새 가져갔는지도 모른 채 망연히 서 있어야 한다.

퀄컴의 자율주행 플랫폼 ‘스냅드래곤 라이드’도 CES에서 선보였다. [EPA=연합뉴스]

퀄컴의 자율주행 플랫폼 ‘스냅드래곤 라이드’도 CES에서 선보였다. [EPA=연합뉴스]

표준으로 등장한 혁신적 기술을 볼 때마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에 감탄하게 되지만, 한편으로 창의성이 부족한 스스로를 탓하면서 좌절감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혁신의 진화 원리에 따르면 이것은 큰 착각이다. 혁신적 기술은 천재적 창의력을 가진 누군가가 하룻밤 새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희미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첫 번째 개념설계를 만들고, 반응을 보고, 경로를 수정하고, 조금 더 달라진 두 번째 버전을 만들어가는 끈질긴 개선의 과정, 이른바 스케일업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것이다. 이 스케일업 과정 중에 흔하디흔한 시행착오와 좌절은 표준으로 가는 ‘서사적 궤적’의 일부일 뿐 결코 실패가 아니다. 이 치열한 도전적 시행착오의 축적이 산업의 표준으로 등장하는 혁신적 기술의 비밀이다.

앞서 말한 사례들도 마찬가지다. 자율주행차의 개념은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처음 등장한 후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발전에 기대어 보일듯 말듯 조금씩 발전했다. 2004년 미국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모하비 사막의 240㎞를 달리는 자율주행챌린지 대회를 개최하면서 기술경쟁에 불이 붙기 시작하지만, 단 한 팀도 완주하지 못하면서 ‘모하비 사막의 대실패’라는 조롱도 받았다. 그러나 치열한 스케일업은 계속되었고, 이제 ‘눈치’를 보면서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스페이스X도 2002년 1단 추진체를 회수하자는 황당한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2015년 최초로 재활용에 성공하기까지 무려 13년간 조금씩 다른 모델을 시도하면서 시행착오를 쌓아갔다. 1997년 창업한 넷플릭스 또한 DVD 영화를 대여해주던 비디오 가게 모델에서부터 출발해서 느린 속도지만 스트리밍 서비스 기술로 발전했고, 이제는 인공지능 기반의 오리지널 콘텐트의 유통 플랫폼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마침내 코로나 위기를 맞이한 전 세계 거실에서 생활의 한 표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에서 반세기 만에 기적적으로 3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 이면에는 반도체와 휴대폰·자동차 등 저개발국으로서는 감히 넘보지 못할 산업에 과감히 도전한 기업가 정신이 있었고, 국가의 지원과 국민적 응원이 있었다. 무엇보다 선진기술을 따라잡기 위한 기술자와 연구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숨어 있었다. ‘소리 없는 영웅’이라는 표현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선진국 따라잡기에 힘써온 한국

셀트리온의 한 연구원이 개발 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항체 치료제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셀트리온의 한 연구원이 개발 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항체 치료제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볕이 쨍할수록 그림자가 짙듯 압축적으로 기술을 습득하는 동안 한 가지 습관이 자리 잡았다. 끈질긴 축적의 시간이 있어야 혁신적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뼈저리게 느꼈지만, 그럴 만한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시장을 지배하는 선진국의 표준을 빠르게 벤치마킹하여 도입하거나, 응용하고 개량해서 더 좋은 성능을 내는데 목표를 두는 지름길로 택했고, 이 추격 전략은 지금까지 성공했다. 한마디로 한국 기술은 축적의 시간을 생략하면서 속성 성장했다. 오늘의 기술 선진국들도 출발은 모두 같았으니, 한국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벤치마킹이 아니라, 도전적 시행착오를 쌓아 스스로 표준에 도전해야 할 단계에 이르러서도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다행히 한국 산업에도 시행착오를 버텨낸 성과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 위기가 시작되던 작년 3월 미국 CNN 방송은 ‘한국의 기업은 어떻게 3주 만에 코로나바이러스 진단 키트를 만들었나’란 제목의 보도를 하면서 바이오 벤처 한 곳을 집중조명했다. 알고 보면 이 벤처기업도 2000년 창업 이후 오랫동안 적자를 버티면서 기술 역량을 꾸준히 축적해온 눈물의 시간이 있었다.

기술 축적 성과 기업들 일부 출현

미국·독일·일본 3개국이 96%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전형적인 선진국 리그 게임인 가스터빈 기술도 1990년부터 30년간 시행착오를 축적한 끝에 2020년 국내기업의 기술로 최초의 실증사업에 돌입하는 계약을 맺었다. 2019년 9월에는 조선업에서 최소 200년 경험의 선진국만 할 수 있다는 설계도 수출에 처음으로 성공하기도 했고, 90년대부터 시작된 배터리와 수소차의 축적된 기술도 최근 들어서야 빛을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새로운 글로벌 표준으로 등장하고 있는 K팝의 성공도 적어도 20년 이상의 다양한 시행착오가 녹여진 결과물이다.

모두 힘 나는 소식들이지만, 산업과 기술 분야 전반을 두루 살펴보면 안타깝게도 이렇게 돋아나는 싹의 수가 너무 적다. 게다가 우리 기술도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는 자부심을 넘어 게임의 룰 자체에 도전하는 시도는 더 적다.

지금 한국 기술은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힘겨운 탈피의 순간에 와있다. 외부 환경은 더 녹록지 않다. 디지털 전환과 에너지 전환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고, 미·중 간 기술패권전쟁은 이미 선을 넘었다. 유럽과 일본 등 기술강국들의 견제는 더 넓고 치밀한 그물로 우리 기업들을 옥죄어오고 있고, 글로벌 플랫폼 기술의 장악력도 날이 갈수록 세져 우리 기술이 파고들 여지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위기는 곧 과거 패러다임의 관성을 털어내고 마침내 역전할 기회이기도 하다.

패러다임 전환할 탈피의 시간

이 기획 시리즈의 주제는 표준의 위치에 오르는 혁신적 기술의 탄생 비밀을 파헤치는 ‘기술혁신의 과학’이자 ‘축적의 진화적 원리’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기술의 과거 성장의 역사와 오늘날 한국 산업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술개발의 첨단을 재해석한다. 기업전략과 국가정책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한 현실을 진단하고 실천을 위한 키워드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퇴적이 아니라 자기만의 아우라를 가진 축적된 전문가로서의 자기 계발전략도 살펴본다.

기술은 정직하다. 오늘 묘목을 심고 키우지 않으면 10년 뒤 거둘 나무는 없다. 산업의 표준을 주도하는 혁신적 기술, 기술챔피언 기업, 기술강국이 되기 위한 창조적 축적의 시간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정동 교수

서울대 교수이자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한국공학한림원의 정회원이다. 옥스포드 저널인 ‘사이언스앤 퍼블릭 폴리시’(Science and Public Policy)의 에디터이며, 대통령비서실 경제과학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