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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英 "1·2차 다른 백신 허용"…전문가들 "과학 버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영국의 코로나19 대응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영국의 코로나19 대응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영국 정부가 코로나19 백신 접종 속도를 끌어올리려 새 지침을 내놓았다가 역풍을 맞았다. 1차 접종과 2차 접종 사이 간격을 기존 4주에서 12주로 넓히는 방안을 내놨다가 의학계의 반발을 산 데 이어 1차와 2차 접종 때 다른 종류의 백신을 쓰는 '혼용 접종'을 허용하겠다고 해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백신 접종 지침에 "1차, 2차 다른 백신 접종 가능" #반발 일자 "같은 백신 못구할 때 쓰라는 것" 해명 #접종 간격 4주→12주 늘려 1차 접종자 확대 시도 #파우치 "3~4주가 가장 큰 효과" 반대 의사 표시

2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최근 백신 접종 지침인 그린북에 1차와 2차 접종 시 서로 다른 종류의 백신을 투여해도 된다는 내용을 새로 넣었다. 현재까지 영국은 화이자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사용을 승인한 상태다. 지침에 따르면 1차로 화이자 백신을 접종한 뒤 2차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등 다른 규제 당국들의 지침과 어긋나 논란이 일고 있다. CDC는 백신 접종 가이드라인에서 두 종류의 백신을 혼용하는 방식을 금지하고 있다. 안전성과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CDC는 "두 차례의 접종은 반드시 동일한 제품으로 완료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백신 전문가들도 비판에 나섰다. 존 무어 미국 코넬대 교수는 뉴욕타임스(NYT)에 "백신 혼용과 관련된 데이터는 전혀 없다"며 "영국 정부는 과학적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단지 현재 상황을 빠져나오는데 급급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영국 정부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세계 최초로 긴급 승인한 아스트라제네카의 백신. [AFP=연합뉴스]

영국 정부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세계 최초로 긴급 승인한 아스트라제네카의 백신. [AFP=연합뉴스]

논란이 커지자 잉글랜드공중보건국(PHE)의 메리 램지 예방접종 책임자는 "혼용 투여는 동일한 백신을 구할 수 없거나 어떤 백신을 맞았는지 알 수 없는 극히 드문 경우와 같은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 쓰일 것"이라고 해명했다. 백신 혼용을 적극 권장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접종자들에게 같은 백신을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가능하지 않을 경우 다른 백신을 2차 투여하는 것이 아예 투여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투여 간격 12주로 연장…파우치 "그런 데이터 없어" 

앞서 영국은 두 차례의 백신 투여 간격을 12주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백신 제조사와 영국 의학계, 미국 보건당국이 "효능과 안전성이 검증된 투여 간격은 3~4주"라며 반대 의견을 내면서다.

화이자는 성명을 내고 "임상 3상 시험 결과 21일 간격으로 투여한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은 검증이 됐다"며 "21일이 넘어간 뒤 백신을 접종할 경우에도 예방 효과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이터는 없다"고 말했다. 영국의학협회(BMA)도 성명을 내고 접종 간격을 늘리는 것은 고령 기저질환자 등 두 번째 접종을 앞둔 이들에 불공정한 조치이며, 현실적으로도 갑작스럽게 일정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비판했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도 CNN과의 인터뷰에서 "1차 접종과 2차 접종 사이의 정상 시간(3~4주) 이상 기다려도 된다는 내용의 데이터는 없었다"며 영국 당국의 지침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우리는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를 고수하고 싶다"며 "임상시험 데이터를 보면 화이자는 21일, 모더나는 28일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전시 상태…정부 지침 따라야" 호소도  

런던 시내의 한 거리.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코로나19 감염자가 급증하자 영국은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 등 지역의 봉쇄 수준을 최고 수준인 4단계로 올리고 2일(현지시간) 현재 이를 유지하고 있다.[AFp=연합뉴스]

런던 시내의 한 거리.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코로나19 감염자가 급증하자 영국은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 등 지역의 봉쇄 수준을 최고 수준인 4단계로 올리고 2일(현지시간) 현재 이를 유지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영국 정부의 이런 백신 접종 지침은 고육책의 성격이 짙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 일단 1차 접종을 시도해 코로나19 확산세를 꺾어보겠다는 것이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화이자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승인하는 등 백신 접종에 승부수를 띄우고 나섰지만, 변이 바이러스 등장에 확산 속도는 더 가팔라지고 있다.
2일(현지시간) 기준 영국의 하루 신규 확진자는 5만7725명으로 지난해 3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누적 확진자는 259만2065명, 사망자는 7만4125명이다.

이 때문에 영국 정부의 지침이 일종의 '전시(wartime) 의학'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의 바이러스 학자 조나단 스토이는 "전시의학과 유사한 것으로 불합리해 보이지 않는다"고 FT에 말했다. 다만 백신 혼용 접종 등이 관행처럼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말했듯 예외적 상황에서만 허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영연방을 구성하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최고 의료책임자들도 공개서한을 통해 "2차 접종 대상자들이 맞을 백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여하면 그들의 면역력을 0%에서 7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며 "우리는 최악의 코로나 사태를 이겨내기 위해 정부의 정책을 따라야 한다"고 호소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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