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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이 소멸된 낙태죄…해법 못 찾는 무력한 거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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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자정을 기점으로 낙태죄는 역사 속에만 남게 됐다. 1953년 건국 초기 사법을 규정한 법전편찬위원회에서 ‘낙태죄 처벌 조항’을 포함 시킨 이후 67년 만이지만, 국회가 법 개정 시한을 놓치면서 입법 공백에 빠진 상황이다.

31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왼쪽 두번째)과 신지혜 상임대표(오른쪽 두번째)가 '낙태죄' 효력 만료를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31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왼쪽 두번째)과 신지혜 상임대표(오른쪽 두번째)가 '낙태죄' 효력 만료를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이날 국회에선 낙태죄 폐지를 하루 앞두고 환영과 우려의 발언들이 이어졌다.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드디어 낙태죄는 폐지된다. 처벌의 시대가 드디어 끝난 것”이라며 “그러나 여성의 건강권이 보호받을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있지 않아 막막함은 여전하다. 정치가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 폐지를 환영한다. 이젠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또 다른 한 걸음을 시작할 때”라고 말했다. 용 의원은 임신 18주차에 접어든 현재 임신 중인 유일한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여성계의 오랜 요구사항이었던 낙태죄 폐지가 사실상 이뤄졌음에도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장 1월1일부터 발생하는 입법 공백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4월 형법상 낙태죄 조항(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위 조항들은 2020년 12월31일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적용된다”고 했다.

이후 법무부는 지난 10월 낙태죄는 유지하되 임신 초기 14주까지는 무조건 처벌하지 않도록 한 정부 법안을, 여야 의원들도 5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그간 국회에선 지난 8일 야당이 참석하지 않은 반쪽짜리 공청회만 한차례 열렸을 뿐 진전이 없다. 당시 여당의 공수처법 개정안 강행 처리 과정에서 소관 상임위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8일 전체회의를 열어 '낙태죄' 개정과 관련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오종택 기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8일 전체회의를 열어 '낙태죄' 개정과 관련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오종택 기자

당내에서도 갈리는 여성계와 법조계

문제 해결의 키를 잡고 있는 건 174석 거대 여당이지만 당내 논쟁은 계속되는 상황이다.
현재 당내에선 임신 14주 이내 처벌을 막는 정부안을 비롯해 권인숙 의원의 ‘낙태죄 완전 폐지안’, 임신 24주 안이면 조건 없이 낙태를 허용하는 박주민 의원의 ‘절충안’ 등이 공존한다.

여성단체 출신 의원들은 여당 소속임에도 이례적으로 정부안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이자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를 지낸 정춘숙 의원은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14주를 규정한 법무부 안이나 10주를 말하는 의료계의 안 모두 현실성이 떨어진다. 10주 이내에 자신의 신체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말이 되나”고 비판했다. 또 “어떤 여성도 임신 중단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 수 제한을 없애고, 임신 중지 약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법조인 출신의 의원들 사이에선 “종교계 등에서도 계속 우려 사항들을 전달하고 있고, 당내에서도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기존 처벌도 거의 없었던 만큼 낙태죄 폐지는 의견 수렴을 먼저 해야 하는 사항”이라고 지적이 나온다. 한 여당 중진의원은 “굳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낙태 허용 범위를 넓혀 욕을 먹느냐”며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당내 첨예한 대립에 한 여당 핵심 관계자는 “당론을 합의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말했다.

의료계‧종교계와 여성계 사이의 사회적 논쟁도

낙태죄폐지반대국민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019년 3월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낙태반대 대회를 열고 있다. 뉴스1

낙태죄폐지반대국민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019년 3월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낙태반대 대회를 열고 있다. 뉴스1

같은날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 '카운트다운! 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에서 참석자들이 헌법재판소에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같은날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 '카운트다운! 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에서 참석자들이 헌법재판소에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법의 공백으로 발생할 현장에서의 혼란이다. 처벌 근거가 사라지면서 더 이상 낙태죄로 처벌받는 사례는 사라졌지만, 합법적인 임신중절의 범위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부인과학회는 지난 28일 낙태죄 폐지에 대한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여성의 안전을 지키고 무분별한 낙태를 막기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임신한 여성의 낙태는 임신 10주(70일: 초음파 검사상 태아 크기로 측정한 임신 일수) 미만에만 시행하겠다”고 나섰다.

종교계에선 ‘형법상 낙태죄 존치’를 요구하고 있다. 반대로 여성계에선 ‘미프진’, ‘미소프로스톨’ 등 유산 유도 약물의 도입, 처방 경로 마련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한 여당 관계자는 “현재 상황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일단은 뭉개고 가되, 내년에 각계 의견을 반영한 절충안을 백지상태에서 논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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