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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그럴듯한 대학 융합전공 … 진정한 '융합'은 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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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경영관에서 이 대학 학생들이 교수의 지도에 따라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로봇을 움직이고 있다. 이 대학은 인문사회계열 학생에게도 소프트웨어를 가르친다.[중앙포토]

성균관대 경영관에서 이 대학 학생들이 교수의 지도에 따라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로봇을 움직이고 있다. 이 대학은 인문사회계열 학생에게도 소프트웨어를 가르친다.[중앙포토]

화학적 결합 이뤄진 전공 수업은 1개뿐?

윤석찬(21) 서울시립대 자유융합대 학생회장은 '도시사회학-국제도시개발학융합형복수전공' 학생이다. 도시사회학과 도시공학을 융합한 '국제도시개발학통섭전공’ 수업에 ‘도시사회학' 수업을 아울러 공부한다. 서울시립대는 2016년에 융합형복수전공을 신설해 신입생을 선발했다. 그러나 윤씨는 "국제도시개발학통섭전공 개설 전공수업은 1개뿐"이라며 "서로 다른 학문의 공통요인을 추출해 재조직한 수업의 비중보다 각 학과 수업의 비중이 큰 커리큘럼 때문에 학문의 융합은 학생에게 떠맡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윤씨는 학생들이 학업과 진로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학문을 융합했지만 이를 화학적으로 결합한 수업의 수가 적어 어떤 부분을 어떻게 특화해야 하는지 모르는 학생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통섭전공만의 융합된 수업이 있으면 학업 방향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인문데이터과학연계전공'을 이수 중인 정모(23)씨도 "화학적 결합이 이뤄진 수업보다 이미 개설된 타과 수업의 비중이 크다"며 단순히 여러 학문 분야를 모아두기만 한 커리큘럼에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는 화학적 결합이 이뤄진 수업의 수가 적어 서로 다른 학문을 융합하는 법을 단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채 바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3학년 수업이면서 1학년 수업?

홍익대에 다니는 박모(22) 씨는 미술대학 예술학과, 문과대학 내 4개 학과, 경영대학 경영학부를 융합한 '문화예술경영융합전공' 학생이다. 박씨는 "첫 수업을 들으며 혼란에 빠졌다"고 말했다. 교과과정 안내에 따라 문화예술경영 1학년에 편성된 독어독문학과 수업을 신청했지만, 이 수업은 독어독문학과에선 3학년 과정에 편성된 수업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타전공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데 고학년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된 상황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타 학과 학생들은 수강 철회해주세요”

단국대 강모(24)씨는 '융합콘텐츠전공' 학생이다. 강씨는 과거 융합콘텐츠전공 수업을 수강신청 했다가 못 들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는 "교수님이 타 학과 학생이 많아지니 수업 분위기를 저해할 수 있다며 수강 철회를 권고했다. 융합콘텐츠전공 학생이기에 전공에 포함된 수업을 신청했는데, 타 학과 학생으로 여겨져 억울했다. 이 사실을 안 소프트웨어(SW)융합학부 학부장이 해당 학과 학과장과 면담했지만 “그럼 이 학생들은 정체성이 뭔가요?”라는 질문만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다른 학생에게서도 이방인 취급을 당했다고 했다. "프로그래밍 과목을 수강신청 했더니 해당 학과 학생들이 과사무실에 '왜 다른 학과 학생들이 우리 학과 인기 과목에 수강신청 해 정작 학과 학생들이 못 듣게 하느냐'고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개별 전공 병렬의 겉으로만 융합”

대학에선 일상에서 구현되기 시작한 '융합'에 주목해 융합전공, 연계전공 등 다양한 형태로 융합교육을 실시한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안 제19조의2’에 따라 둘 이상의 학과 또는 학부를 연계 융합한다. 그러나 현 대학가의 융합교육은 학문 간 화학적 결합이 결여된 채 단순히 여러 학문을 병렬한 물리적 결합에 그친 교육과정으로 운영되기 일쑤다. 윤석현 단국대학교 SW융합학부 학부장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과목을 융합전공에 속한 각 학과에서 수강하고 융합전공에서는 3~4개 정도의 필수 과목만 제공하는 형태로 대부분 융합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평가용 융합도 빈번”

서울대학교 통합창의디자인 연계전공 폐지 안내. [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캡처]

서울대학교 통합창의디자인 연계전공 폐지 안내. [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캡처]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한 융합전공은 학생 수 부족과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서울대의 경우 현재(2020년 11월 기준)까지 33개의 연계·연합전공이 개설됐는데, 그중 12개의 연계전공이 폐지됐다. 다른 대학의 사정도 비슷하다.

대학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학 입장에선 계속 융합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충청도 한 대학의 교직원은 교육부에서 "틀려도 좋으니 (융합의 방향으로) 바꾸어만 달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대학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선 융합전공을 개설해야 한다는 사실이 압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의철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보여주기식 융합교육' 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인계받아 운영했던 통합창의디자인 연계전공을 예로 들며 "매우 많은 학과가 포함돼 다양한 융합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큰 관련이 없는 과도 포함되며 커리큘럼이 방만해졌다"며 "자기 수업이 융합교육 커리큘럼에 포함된 걸 모르는 교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융합교육 커리큘럼을 만들 때 단순히 여러 학과를 모으는 차원에서 벗어나 교육의 방향과 내용에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SUTD 캠퍼스 모습. [SUTD 홈페이지]

SUTD 캠퍼스 모습. [SUTD 홈페이지]

정 교수는 싱가포르 기술·디자인대(SUTD)에서 연수했던 경험을 말하며 한국 대학도 체계적인 융합교육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SUTD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 2년 전에 교수 선발을 마치고 이후 교수들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로 연수를 보내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또 정 교수는 "통합에서 중요한 것은 전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전문분야를 고민하는 것”이라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논의한다면 통합이 구호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정 지원에 기형적 전공 개설”

김상은 미래융합협의회장 겸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는 "융합이 사회적 트렌드가 되고 대학이 정부 지원을 받고자 융합 학과를 만들고 있지만 학과 개설 자체가 진정한 융합의 구현은 아니다"며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한 학과 개설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육부가 학문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뒤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재정적 지원에 치우치면 기형적인 학과와 전공만 개설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융합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학과 중심으로 짜인 한국 대학의 시스템이 변해야 한다"고 했다. 또 "교육부가 학과 정원, 심의 단계 등에서 제도적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김상학 남서울대 융합교육원장은 "융합교육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줄 학내 컨트롤 타워가 생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행정 조직이 있어야 새로운 형태의 전공 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학생들의 불편과 요구를 수용해 발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윤석현 단국대 SW융합학부 학부장은 "정부가 '융합 연구 및 교육 위원회'와 같은 단일 창구를 만들어 좀 더 효과적으로 융합교육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과 이기주의의 벽을 넘어야

‘학과 이기주의’는 융합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윤 교수는 "교수와 학생 모두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려고만 하고 더 넓은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융합전공 학생들은 우리 학생들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진 교수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에볼라 치료제로 개발된 렘데시비르를 코로나19 치료에 활용하는 길을 연 사람은 의학, 약학 전문가가 아니라 데이터 분석가였다. 앞으로 발생할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학문 간 교류가 원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소현 인턴기자 lee.sohyu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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