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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풍경에 그려진 의문의 살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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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호 21면

2021 읽으면 좋은 책

2020년 읽었던 책들로 올 한해를 되돌아봅니다. 연말연시 읽으면 좋은 책들도 함께 소개합니다. 새로운 출판 경로를 제시한 책, 믿고 읽는 저자, 재테크, 이념적으로 뜨거운 책, 미디어 셀러. 이런 책들이 올해 두드러졌습니다. 매력적인 소설과 마음을 다독이는 책을 어수선한 세밑에 가까이하는 것은 어떨까요. 소개한 책들은 지난 17일부터 전국 교보문고 15개 매장에 진열 중입니다. 한 달간 만날 수 있습니다. 올해·내년 책들은 중앙SUNDAY 출판팀과 교보문고가 함께 선정했습니다.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35년간 90여 권의 소설을 쓰고, 매년 베스트셀러를 내온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대명사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번엔 마술사와 함께 돌아왔다. 지난달 30일 전 세계 동시 출간된 신간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은 기술 발전과 자본주의가 낳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쳐온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답게 코로나 시대의 풍경을 발빠르게 녹여내 시작부터 흥미를 끈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이다. 히가시노는 밀실 살인 수수께끼 같은 본격 미스터리부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류의 판타지,  『라플라스의 마녀』같은 SF까지 방대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는데, 특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내세운 시리즈물이 인기였다. 아픈 과거를 품은 형사의 시선으로 사건 이면의 인간관계의 본질을 파헤치는 가가 형사 시리즈, 전기공학 전공자답게 과학자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초현실적 현상을 가장한 지능 범죄를 해결하는 갈릴레오 시리즈 등, 기존 미스터리 장르물에 없던 새 영역을 개척해온 히가시노가 이번엔 과연 어떤 신선한 접근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2021년 봄. 코로나의 여진이 남아 있는 한 관광 소도시에서 존경받는 어른 가미오 에이치가 살해당한다. 도쿄에살고 있는 딸 마요는 서둘러 고향에 내려온다.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고향 사람들은 인기 만화가인 마요의 동창 구기미야를 이용해 재기의 기회를 도모하고 있는데, 에이치의 제자이자 마요의 동창인 친구들이 조금씩 수상하다. 그때 기발한 트릭으로 온갖 정보를 입수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해 가는 게 마술사인 삼촌 다케시다.

의문의 살인사건과 코로나 시대의 디테일한 묘사가 맞물리면서 독자의 호기심은 급상승한다. 특히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 만화 『환뇌 라비린스』의 내용이 매력적인 미끼다. 천재 과학자들의 뇌가 연결된 네트워크 속 가상공간에서 환경파괴를 막으려는 과격한 프로젝트가 지구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혹시 뇌과학 서스펜스 『숙명』(1990년)부터 이어져온, SF와 현대 의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술발전이 향하는 디스토피아를 통해 휴머니즘을 이끌어냈던 일련의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걸까.

그런데 이런 장치들은 양념일 뿐, 초기작인 『백마산장 살인사건』(1986년) 류의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에 가깝다. 『숙명』 출간 때 이미 “본격 미스터리 공식을 졸업하고 인간에 관한 소설을 쓰겠다”며 사건 자체보다 ‘인간’이라는 더 큰 수수께끼를 던져온 작가의 행보를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550쪽에 이르는 두터운 분량에도 쉼없이 모든 등장인물을 용의선상에 올리며 수수께끼를 증폭시켜 멈출 수 없게 만드는 ‘페이지터너’의 내공은 그대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입체적인 퍼즐 맞추기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드러내는 특유의 스타일도 여전하다. 셜록 홈즈 류의 전형적인 탐정의 추리력을 넘어 스스로 트릭을 구사해 고급정보를 입수하는 마술사의 튀는 풀이 방식은 독자를 홀리는 장치다. 잠시라도 갑갑한 현실을 잊게 해줄 ‘히가시노 월드’로 떠나는 여행의 매력적인 안내자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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