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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 평양에 다녀온 나의 마스터스 굿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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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굿즈. 성호준 기자

마스터스 굿즈. 성호준 기자

“아빠 평양에 살아요? 평양 주소로 택배가 왔네요.”

골프 메이저대회 마스터스에 가면 기념품(굿즈, goods)을 사는 재미가 있다. 모자, 셔츠, 골프용품은 물론 기념시계, 지갑, 컵과 쟁반, 쿠션 등 다양한 물건이 있다. 대회장에 오는 사람에게만, 그것도 대회 기간 딱 일주일 동안만 파는데 매출이 600억 원으로 알려졌다. 이베이 등에서 프리미엄도 붙는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마스터스에 못 갔지만, 굿즈를 샀다. 무관중 대회라 주최 측이 특별히 온라인 숍을 열었다. 입장권이 있거나, 평소 현장 취재하던 기자들은 온라인으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1인당 두 번씩만 살 기회를 줬다.

오늘 어떤 기사를 쓸지 보고하는 분주한 아침 시간에 온라인 샵이 열렸다는 메일이 왔다. 급히 주문하고 주소를 기재하는 중에 구글의 자동완성 주소가 떴다. 바쁜 때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확인을 눌렀다. 실수였다.

내가 사는 도시(서울)와 구가 영어가 아니라 한글로 입력됐다. 왜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을 했을까. 구력 십여년인데 아직도 6번 아이언인줄 알고 9번 아이언을 치기도 하는 덜렁대는 내가 한심했다. 마스터스 현장에서 물건을 살 때 사람이 워낙 많아 정신이 없었는데, 그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고 위안을 해봤다.

시와 구를 제외한 다른 주소는 영어로 적었고 메일 주소, 우편번호, 이메일 등이 있었기 때문에 똑똑한 인공지능 물류 컴퓨터가 해결해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주소에 관한 메일을 보내려고 인터넷을 켰더니 벌써 화물이 선적됐다는 메일이 와 있었다.

며칠 후 지인으로부터 마스터스 굿즈를 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첫 주문이 문제없이 선적됐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전 주소 그대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도착 예정일에 물건이 오지 않았다. 화물 위치추적 서비스로 찾아봤더니 굿즈는 평양에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한글 주소 때문에 컴퓨터가 헷갈려 북한으로 판단한 듯했다. 수출을 막는 대북 제재는 어떻게 된건가.

북한 홍보 매체에 의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8언더파 34타를 쳤다고 한다. 2011년 그가 사망했을 때 미국 미디어는 “마스터스에 나오면 반드시 우승했을 골퍼”라고 비꼬았다. 북 당국이 나의 마스터스 굿즈를 억류할 것 같아 잠을 못 이뤘다.

온라인 숍에 정중히 “해결해주면 감사하겠다”는 메일을 두 차례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나의 실수도 있었기 때문에 항의하지도 못했다.

내 것은 그렇다 치고, 나에게 부탁한 사람의 물건이 더 걱정이었다. 같은 주소를 썼으니 그것도 평양으로 가지 않겠는가. 지인에게 “물건을 받지 못할 것 같다”고 전했다.

화물 송장. 남한 평양이라는 주소가 적혔다. 이전 송장에는 한국 평양이라고 찍혀있었다. 성호준 기자

화물 송장. 남한 평양이라는 주소가 적혔다. 이전 송장에는 한국 평양이라고 찍혀있었다. 성호준 기자

일주일쯤 지난 뒤 누런 박스에 마스터스 굿즈가 왔다. 내 것이 아니었다. 지인의 부탁을 받고 주문한 두 번째 화물이었다. 내 화물 위치추적 결과는 아직도 평양이었다. 내가 평양에 억류된 것처럼 괴로웠다. 내 건 물건너간 것 같아 지인에게 굿즈를 전해주면서 사정을 해서 모자 하나를 얻었다.

며칠 후 위치추적 시스템은 화물이 벨기에에 있다고 했다. 북한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다. 북한에 있었다면 인근 중국이나 일본을 경유하면 될 텐데 벨기에가 찍힌 걸 보니 물류시스템이 완전히 헷갈리고 있는 듯했다. 내 굿즈는 영원히 미아가 되는가. 마스터스는 물론 화물회사, 트래킹 홈페이지 등에 메일을 보냈지만, 답은 없었다.

화물을 거의 포기한 며칠 전,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평양에서 물건이 왔다”고 했다. 잃어버린 반려견이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 아들은 수진지와 발신지를 헷갈렸다. 수진지가 평양으로 되어 있으니 당연히 발신지로 알았을 거다.

그런데 이 물건이 정말 평양에 갔다 온 것일까. 송장 마지막 발신지는 벨기에였다. 수신지는 ‘남한, 평양’이었고 나머지는 서울 집 주소로 찍혀 있었다. 송장 밑에 붙은 이전 송장에서 어렴풋이 ‘한국, 평양’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굿즈는 한국 평양을 거쳐서 벨기에를 경유해 남한 평양으로 온 것이다. 나는 평양이라고 쓰지 않았는데 왜 컴퓨터는 평양이라 인쇄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남한 평양을 서울로 알아보고 주소를 제대로 적어준 집배원의 손 글씨가 정겹다. 아직도 사람이 컴퓨터보다 우월하다.

어쨌든 화물이 평양에 다녀온 건 맞는 것 같다. 마스터스 굿즈가 북한에 간 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나에겐 오래 기억될 굿즈가 될 것이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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