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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세한도’에 띄우는 감사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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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한다. 돈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을 뜻한다.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과 ‘세한도’(국보 제180호)가 흔히 무가지보의 대명사로 꼽힌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걸작 ‘세한도’(歲寒圖)가 올해 아무런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코로나19로 헛헛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랬다.

금관훈장 수상한 기증자 #“감사합니다” 한마디 남겨 #짧은 인사말의 오랜 감동 #“예술은 영원하다” 되새겨

그래도 궁금했다. 불경죄(?)를 무릅쓰고 고미술 전문가들에게 ‘세한도’의 값을 추정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경매에 나온다면 감정가가 얼마나 될까요.” 대답은 각인각색이다. 적게는 100억원에서 많게는 1000억원까지 불렀다. “10여 년 전 인사동 상인들이 술자리에서 ‘세한도’를 놓고 토론했는데, 그때 1000억원 얘기가 나왔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지금 더 나가지 않겠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추위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농축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옛 선비들의 각별한 우정이 느껴진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추위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농축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옛 선비들의 각별한 우정이 느껴진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는 스토리의 보고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통한 추사가 남긴 몇 안 되는 그림인 데다 제주 유배 시절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인연이 각별하다. 18세기 한·중 학자들의 활발한 교류를 상징하는 문화대사인 데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운명 또한 기구하다. 그간 그림 주인도 10차례 바뀌었다. 대하 드라마를 쓰기에 충분한 얘깃거리다. 그중 백미는 역시 올해 국민의 품으로 영원히 돌아온 것이리라.

지난주 ‘세한도’ 기증자 손창근(91)옹의 금관문화훈장 수여식이 열렸다. 코로나19 사태로 수상자만 참석한 이날 행사를 유튜브 중계로 지켜봤다. 몸이 불편한 손옹 대신 세 자녀가 받았는데, 다행히 손옹의 수상 소감이 사전 제작한 영상으로 흘렀다. 그는 화면 속에서 “감사합니다” 다섯 글자만 짧게 말했다. 뭉클했다. 그 어떤 화려한 언변보다 울림이 컸다. 이왕 떠나보낸 보물, 더는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추사의 친구 권돈 인의 또 다른 ‘세한도’. 옛 선비들의 각별한 우정이 느껴진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추사의 친구 권돈 인의 또 다른 ‘세한도’. 옛 선비들의 각별한 우정이 느껴진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기증은 2020년 문화계의 가장 큰 뉴스로 꼽을 만하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우리 문화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의 경사”라고 표현했다. 100% 동의한다. 고미술 애호가들은 자녀들에게도 명품을 선뜻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손옹의 차남 손성규(61) 연세대 경영대 교수도 언론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금고에 있던 ‘세한도’를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세한도’는 3대를 잇는 기증으로 화제가 됐다. 손옹의 부친 손세기(1903~83)씨가 구입했고, 손옹이 보존했고, 그 자제들이 동의했다. 2년 전에는 금쪽같은 문화재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적도 있다. 그리고 올해 ‘세한도’로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었다. 추사가 지금 환생한다면 그 역시 “감사합니다” 하지 않을까.

‘세한도’ 기증자 손창근옹.

‘세한도’ 기증자 손창근옹.

손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섭섭함이 있을 것 같았다.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아버님께선 밤새 끙끙 앓으시며 숙고하셨어요. 아무리 자식들이라도 재산 문제를 쉽게 얘기할 수 없잖아요. 기증도 아버님이 홀로 결정하셨습니다. 정말 외로운 고민이었죠. 자녀들도 딴 의견을 낼 수 없었어요. 아버님의 큰 뜻을 존중하는 게 자식 된 도리라 여겼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다시 한번 불경죄를 짓는다. 참고로 2018년 기증품 감정가를 알아보았다. 총 467억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손세기·창근 부자는 1974년 서강대에 고서화 200점을, 2012년 국가에 1000억원대 산림을, 2017년 KAIST에 50억원 상당의 건물을 내놓았다. 전례가 드문 적선지가(積善之家)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무가지가(無價之家)다.

‘세한도’ 특별전(새해 1월 31일까지)이 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현재 박물관 문은 닫혔지만 머잖아 다시 불후의 명작과 마주하기를 고대한다. 한겨울 맹추위를 뜻하는 세한이 결국 봄에 자리를 물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상황에 따라 특별전 연장도 추진할 만하다. 지난 200년을 힘들게, 또 힘차게 버텨온 ‘세한도’가 아닌가. 이참에 오래, 널리 즐겼으면 한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에 찍힌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기억한다.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뜻이다. 추사와 제자 이상적의 우정을 가리키지만 이젠 우리가 손씨 3대 부자에 돌려줘야 할 인사말 같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시절은 흉흉하지만 예술은, 우정은, 사랑은 영원하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