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이대로 가나] 上. 건강보험은 감기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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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은 이미 망가져 은행 빚을 지고 있다. 돈이 없다 보니 진료비의 절반밖에 보장하지 못한다. 건강할 때는 돈만 거둬가고 정작 큰 병에 걸리면 도움이 안된다는 인식이 뿌리깊다.

이에 따라 아예 사보험을 도입해 민간 보험사들을 참여시키거나 중증 환자에 대한 보험처리 범위를 늘리는 등 구조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개선작업은 뒷전인 채 7월로 예정된 건보재정 통합에만 매달려 있다. 경제정책 및 기업관련 연구소인 코레이(대표 이윤재)와 공동으로 부실한 건강보험 실태를 3회에 걸쳐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해 본다.

백혈병 환자 閔모(32.전북 전주시)씨는 1997년 9월 병에 걸린 뒤 골수를 받고 이를 이식하는 수술에 각각 2천만원이 들었다. 수술 후에도 임파구 수혈과 수차례에 걸친 골수검사ㆍ약값 등으로 뭉칫돈이 들어갔다.

그간 閔씨가 낸 치료비는 줄잡아 1억원이고 건강보험에서는 4천여만원밖에 안 나왔다. 閔씨 본인이 총 진료비의 60%를 부담한 것이다. 초기엔 아버지의 돈으로 메우다 2001년 9월 직물 점포를 팔았다. 그래도 모자라 서울 신당동의 40평짜리 단독주택까지 처분했다.

지난해 초엔 전주시의 3천만원짜리 임대아파트를 구해 이사했고 다음달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됐다. 병 때문에 중산층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한 것이다.

암 등 큰 병에 걸린 환자들은 기둥뿌리를 뽑아야 한다. 보험 적용 범위가 52%에 불과해 나머지는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 선진국은 진료비의 80~90%를 건강보험이 보장한다. 그래서 '반쪽짜리 보험'으로 전락했다는 말이 나온다.

◇ '건강보험은 감기보험'

본지가 백혈병 및 암환자 17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 보험으로 충당한 진료비가 전체 비용의 절반에도 훨씬 못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비를 대느라 집.땅을 팔거나 수천만원의 빚을 진 사람도 많았다.

반면 감기환자는 거의 완벽하게 보호한다. 건보 재정은 감기 진료비의 70%를 부담한다. 지난해 감기환자에게 지출된 건보 재정은 1조9천3백여억원으로 전체 보험지출(13조6천9백억원)의 14%를 차지했다. 암에 지출된 건보 재정은 6천7백78억원으로 전체 지출의 5%에 불과하다.

코레이가 전국 건보가입자 1천2백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건보 만족도는 5점 만점에 1.56점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57.2%가 고액의료 서비스가 보험으로 처리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 대책은 뭔가

건강보험은 적게 내고 적게 받는 '저부담 저급여'체계다. 77년 시작된 이후 89년 전국민을 대상으로 확대하는 데 매달려 낮은 보험료로 출발했고, 90년대 후반에는 건보 통합 논쟁에 휘말리면서 보험료를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2000년 7월 시행한 의약분업.건보통합 등으로 건보의 살림이 망가졌다.

지난해 말 현재 2조5천억원의 빚을 지고 있어 보험 적용 범위를 확대할 여력이 없다. 반쪽짜리 보험을 살리려면 보험료를 올려야 하지만 쉽지 않다. 최근 3년간 보험료를 연평균 11% 올릴 때 가입자 단체의 반대가 엄청났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권순만 교수는 "감기 부담을 높여 그 돈을 큰 병에 써야 한다"며 건보 체계의 구조조정을 제안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지난해 7월 "한국에선 보험 적용범위가 좁아 환자 부담이 너무 크다"며 "과다한 비용이 소요되는 질병에 대한 보호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는 건보 구조개혁에 소극적인 편이다. 김화중(金花中)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서울대 보건대학원 특강에서 "소액 진료비를 올려 중환자의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당장 개혁할 의사가 없다. 보험 적용범위 확대는 재정 상황을 봐가며 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충북대 김기홍(경영학)교수는 "인기에 연연해 건보 개혁을 늦춰서는 안되며 건강보험을 보충할 민간의보 도입 논의도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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