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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몰락한 평안도 선비, 중국서 첨단과학에 눈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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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선 말기 역사로 읽는 이광수의 『무정』

조선 말기 중국 상해에서 나온 과학잡지 ‘격치휘편’에 실린 소방용 고가 사다리.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말기 중국 상해에서 나온 과학잡지 ‘격치휘편’에 실린 소방용 고가 사다리.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후기의 3대 표류를 꼽으면 무엇이 있을까. 영조 때 제주 선비 장한철은 한양의 과거에 응시하러 상선을 탔다가 풍랑을 만나 유구 왕국의 무인도에 표류했다. 정조 때 제주 출신 무관 이방익은 우도에서 풍랑을 만나 대만 옆의 팽호도에 표류했다. 순조 때 우이도 상인 문순득은 대흑산도에서 풍랑을 만나 유구와 필리핀에 표류했다. 장한철은 안남 상선에 구조돼 곧장 제주를 향했으나 이방익은 대만·복건을 거쳐 북경에서 조선으로 귀환했고, 문순득은 마카오를 거쳐 북경에서 조선으로 귀환했다. 1927년 대중잡지 ‘별건곤’은 일본에 사행을 떠난 신숙주가 귀로에 풍랑을 만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환상적인 역사를 상상했다.

개항 상해서 신서적 수십 종 구입 #무기·철도·선박책 등 탐독했을 듯 #격물치지가 나라 다스리는 근본 #실학의 큰 틀로 근대 서학 반성을

표류의 길은 바다였으나 귀환의 길은 중국이었다. 그것은 북경 너머의 중국을 견문하는 드문 기회를 의미했다. 명나라 성조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조선의 사행 코스는 한양~북경으로 고착됐다. 고려 말기 정몽주나 조선 초기 이방원이 명나라 수도 남경에 사행을 다녀온 일, 또는 그 한참 전에 원나라 수도 대도의 만권당에서 글을 읽던 이제현이 사천 아미산에 유람을 다녀온 일, 비슷한 시기 충선왕이 원나라 황실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멀리 토번(티베트)에 유배된 일은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돼 있었다. 북경 너머 열하에서 천하대세를 논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그런 의미에서 문제작이었다.

신문물의 시대, 번역서로 서양 만나

조선 말기 중국 상해에서 나온 과학잡지 ‘격치휘편’의 표지.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말기 중국 상해에서 나온 과학잡지 ‘격치휘편’의 표지.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개항의 시대가 되자 빗장이 풀렸다. 조선 사람의 발걸음은 북경 너머의 곳곳을 향했다. 조선 상인은 이 무렵 중국 깊숙이 들어가 밀무역을 하고 있었다. 1881년 조선 상인 세 명이 호북 한구(漢口)를 거쳐 양자강을 타고 사천 무산(巫山·현 충칭)에 당도해 인삼·종이·포목 등을 판매하다가 적발돼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추방됐다. 1885년에는 조선 상인 두 명이 양호(호남·호북)와 양광(광동·광서), 사천과 귀주, 그리고 운남성까지 가서 밀무역을 하다가 적발돼 호북에서 윤선을 타고 조선으로 추방됐다. 상당수 조선 상인은 인삼을 갖고 강서성을 찾았는데 이곳 임강(臨江)에 약재 시장이 번창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중국 상해에서 나온 과학잡지 ‘격치휘편’의 발행인 존 프라이어.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말기 중국 상해에서 나온 과학잡지 ‘격치휘편’의 발행인 존 프라이어.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의 지식인도 닫혀 있던 중국의 내지에 들어갔다. 1895년 개성 시인 이신전은 윤선을 타고 상해에 도착해 강소·안휘를 유람했는데, 여행 기간 지은 기행시를 엮어서 『남유음고(南游吟稿)』를 편찬했다. 1905년 개성 시인 김택영은 망명을 결행해 남경에서 가까운 남통에 정착했는데, 임오군란 당시 오장경의 막료로 조선에 왔던 장건과의 인연으로 현지 출판사 한묵림서국에서 일했다. 1896년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은 산동성 곡부 공묘에 문인을 보내 거의를 고유하게 했고 다시 을사늑약 후에는 공묘를 향한 망명길을 떠났다. 1914년 이병헌은 공교 네트워크를 통해 북경·곡부·상해·항주를 거쳐 홍콩에 가서 강유위를 만났다.

북경 너머 떠오르는 중국의 새로운 중심은 상해였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 형식의 스승이자 영채의 아버지인 평안도 안주의 박 진사는 홍경래의 난으로 멸문의 화를 당한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뜻한 바 있어 대략 1901년경 중국에 유람을 갔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고 상해에서 신서적 수십 종을 사서 귀국한 다음 청년을 모아 사상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딸 영채를 학교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하면서도 직접 집에서 『시경』을 가르쳐 신구 절충의 여성 교육에 힘썼다. 『무정』은 서둘러 박 진사를 파멸시키고 영채에게 고난의 운명을 부과한다. 왜 그랬을까. 『무정』의 한가지 독법이다.

박 진사가 고른 상해의 신서적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1888년 상해의 16개 서점에서 판매하는 서적 목록이 있다. 그가 한역 서학서를 좋아했다면 격치서실 판매 도서를 골랐을 것이다. 여기에는 강남제조총국·격치휘편관·익지서회 등의 책이 포함돼 있다. 강남제조총국은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시작하면서 상해에 세운 무기공장이다. 총국은 번역관을 두고 영국 선교사 존 프라이어(傅蘭雅)를 고용해서 철·석탄·포·윤선 등 부국강병에 관한 서양 도서를 전략적으로 번역했는데 독일의 크루프포(砲)를 다룬 『극로백포설』도 이 중의 하나다. 크루프포는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진가를 발휘했고 이에 청나라는 북양 육군과 북양 해군을 크루프포로 무장시켰다.

박 진사는 어쩌면 프라이어가 발간한 과학잡지 ‘격치휘편’을 구매했을지도 모르겠다. ‘격치휘편’ 연재물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관련된 첨예한 주제라서 조선 정부의 관심을 끌었는데, 프라이어가 영국 런던에 가서 부근의 공장을 취재하고 지었다는 ‘역람영국철창기략(歷覽英國鐵廠紀略)’은 1884년 한성순보에도 전재돼 이미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 조선의 연행 사절단은 1874년 북경에서 ‘격치휘편’의 전신인 ‘중서문견록’을 열독하거나 구매하면서 서양 지식과 시사 뉴스를 접하고 있었으니 ‘격치휘편’에 대한 관심도 이 시기로 소급될 수 있겠다. 독립협회가 발간한 ‘대조선독립협회회보’ 제3호(1896.12.31)는 상해에서 저렴하게 ‘격치휘편’ 전질을 구매하기를 권하였다.

독립협회서 과학잡지 구독 권하기도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로 꼽히는 『무정』 초판본. [사진 고려대]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로 꼽히는 『무정』 초판본. [사진 고려대]

『무정』 에 따르면 박 진사는 고향에서 철도와 윤선을 말하며 과학지식 전파부터 힘썼다. 만약 그가 ‘격치휘편’을 샀다면 그 풍부한 콘텐트는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물음이 기다리고 있다. 왜 격치인가. 프라이어와 함께 격치서원을 세워 중국 근대 과학기술 교육을 시작한 화학자 서수(徐壽)는 ‘격치휘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격물치지의 학문은 곧 수제치평(修齊治平)의 첫 단계(初級) 공부다.” 의미심장하다. 성리학의 기본 문헌 『대학』에는 팔조목이 있는데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치국의 근본은 격치인데 중국은 과연 서양처럼 격치를 잘하고 있는가.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로 꼽히는 『무정 』의 작가 이광수. [중앙포토]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로 꼽히는 『무정 』의 작가 이광수. [중앙포토]

영국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李提摩太)도 『시사신론』(1894)의 글 ‘중국은 격치학을 구해야 한다’에서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청나라 직예성 총독 이홍장의 도움으로 천진시보의 주필이 돼 서양을 소개하는 많은 기사를 썼는데 이를 엮은 것이 이 책이다. 그는 ‘실학’을 말했다. 중국은 삼대 이래 실학을 강구해서 본래는 격물치지가 치국평천하의 근본이었으나 당송 이후 실학을 강구하지 않은 반면 서양은 실학을 강구해서 격치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미국 선교사 길버트 리드(李佳伯)도 월간지 ‘만국공보’의 글 ‘중국은 신학을 넓혀 구학을 도와야 한다’(1897)에서 실학을 말했다. 중국은 진시황과 한무제 때문에 실학이 사라졌는데 서양은 그 실학, 곧 격치기예학을 발전시켰으니 이를 보편 학문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경 너머의 중국이 조선에 열렸을 때 그 중심지 상해는 근대 서학을 한문으로 풀이해 전파하는 번역의 메카였다. 중국과 조선이 공유한 전근대 유학은 근대 서학을 만나 ‘실학’이라는 근대 패러다임으로 자신의 학문 전통을 반성했다. 실학이란 부재 또는 결핍을 자각하도록 인도하는 개념이었다. 이제 근대 서학에도 진지하게 되묻고 싶다. 근대 서학의 격물치지는 실학이었는가. 실학이었다면 왜 아직도 이 지구에서 치국평천하를 보지 못하는가. 실학이란 용어를 이제 근대 서학의 반성에 관한 개념으로도 치열하게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북경 너머에서 유럽 너머로, 표류의 길에서 귀환의 길로, 역사는 그렇게 흐른다.

춘원이 부러워한 중국의 영어학습서

『무정』의 박 진사가 만약 상해에서 책 구경을 했다면 점석재서국에서 판매하는 각종 화보와 비첩, 지도에도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근대 상해의 도시 풍경과 생활 풍속을 담은 ‘신강승경도(申江勝景圖)’를 보았다면 기념품 삼아 샀을지도 모른다. 점석재는 1884년 『고금도서집성』을 납활자로 인쇄해 대중적인 보급을 시도했는데 물론 박 진사가 이를 구매할 처지는 아니었다. 현재 본래의 희소한 구리활자본은 규장각에, 근대의 대중적인 납활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만약 박 진사가 영어 공부에 관심이 있었다면 1897년 설립된 상무인서관의 영어 학습서 『화영초계(華英初階)』 『화영진계(華英進階)』를 구입했을 수도 있다. 인도인의 영어 학습서에 중국어 설명을 붙인 교재로, 출간 열흘 만에 초판 2000부가 매진될 정도였다. 이 밖에도 신교육 교과서,  『사원(辭源)』 같은 사전, 『사부총간(四部叢刊)』 등을 망라했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에도 이런 기관 하나 있으면 하고 부러워했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