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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난 해결책은 호텔 개조한 '공공 기숙사'…정부는 정신승리중

중앙일보

입력

'호텔 전세'와 '호텔 거지'.

[현장에서] #수요와 공급 맞지 않는 공급대책 #호텔 개조한 청년 기숙사 '안암생활' #난데없이 전세난 해법과 예시로 등장 #'전세형' 신조어만 만들어 혼선 가중

정부가 쏟아낸 난데없는 부동산 정책에 등장한 신조어다. 전세난 해결을 위한 비주택 공실 리모델링의 일환으로 ‘호텔 전세’까지 만들겠다고(11·19 대책) 하자, 시장은 이를 ‘호텔 거지’로 받아들였다. 해당 주택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론의 질타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호텔 전세는) 청년에게 힘 되는 주택”이라고 되받아쳤고, 서울 안암동의 청년 주택 ‘안암생활’을 예로 들었다. 지난 1일 국토부가 이곳을 공개한 이유다.

서울 성북구에 문 연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관광호텔을 리모델링했다. 취사시설이 없다.[연합뉴스]

서울 성북구에 문 연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관광호텔을 리모델링했다. 취사시설이 없다.[연합뉴스]

현장을 본 여론은 들끓었다. “3~4인 가구가 살 곳이 못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안암생활'의 정확한 프로젝트 명칭은 ‘민간매입약정형 사회주택’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올 초 관광호텔을 매입해 1인 특화용, 청년 가구용으로 개조해 공급했다. 건축법상 용도는 ‘기숙사’다. 기숙사는 공동취사시설 이용이 세대수 50% 이상이 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즉 가가호호 취사시설을 갖출 필요가 없다. 애초에 취사시설이 없었던 호텔 개조의 한계다. LH의 한 관계자는 “호텔을 일반적인 공동주택 용도로 인·허가를 받으려면 주차장부터 취사시설까지 제약조건이 많고 공사범위가 커져 비용 부담이 크다”고 설명했다. 결국 호텔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기숙사나 고시원 형태로 개조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주변 대학가의 원룸과 비교하면 공공의 지원으로 새 시설에 저렴한 월세 혜택을 누릴 수 있어 김 장관 말대로 “청년에게는 좋은 주택”이다.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이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1차 부동산시장 점검 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해 홍남기 부총리의 발언을 듣고 있다.  [뉴스1]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이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1차 부동산시장 점검 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해 홍남기 부총리의 발언을 듣고 있다. [뉴스1]

문제는 이 ‘공공 기숙사’가 전세대책에 포함되며 마치 ‘공공전세’ 물량처럼 집계되면서 빚어졌다. 졸지에 '공공 기숙사'의 수요자가 청년에서 전세난에 시달리는 국민으로 돌변했다. 수요와 공급으로 따져도 어불성설이다.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전셋집은 차도 댈 수 없고 내 집에서 밥도 못해 먹는 임시 주거가 아니다. 전세대책 물량에 섞지 않는 것이 옳았다.

LH 입장에서도 난감하다. '안암생활'은 전세대책과 관계없이 정부의 주거복지로드맵에 따라 청년 가구 1인 특화 주택으로 추진한 사업이다. 대책 마련에 급한 정부가 이것저것 끌어들인 탓에 난데없이 ‘호텔 거지’의 대표 사례가 됐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질 좋은 주거환경을 원하는 국민에게 다가구ㆍ다세대를 공급 카드를 내민 것도 적절치 않다. 국민은 아파트만큼의 주거 인프라를 갖춘 집을 원하는데, 공급자인 정부는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다. 다가구ㆍ다세대 내부 구조만 강조하며 “방 3개니 아파트만큼 좋다”(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고 강변한다.

임대차법 이후 치솟는 아파트 전세가격지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임대차법 이후 치솟는 아파트 전세가격지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질 좋은 다세대ㆍ다가구 공공임대를 매입해 공급하겠다며 중ㆍ대형 건설사 참여 격려용 인센티브까지 만들었다. 앞으로 신규 아파트용 공공택지를 공급할 때 다세대·다가구 건설 실적에 따라 우선 공급이나 가점을 주겠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추진하던 택지 공급 개선 방안에 갑자기 전세난 대책의 인센티브를 섞어 넣은 것이다.

국토부의 한 관계자는 “건물을 제대로 지으려면 중소업체보다 큰 기업이 잘할 가능성이 높지 않냐는 판단”이라며 “주어진 정책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정부가 허둥지둥 만든 졸속 대책에 시장은 꼬여만 간다.

정부가 '영끌'한 공공임대 공급물량도 정확하지 않다. 정부는 전세 대책에서 11만4000가구의 전세형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했지만, 추정치일 뿐이다. '전세대책'이라는 사실을 의식해서인지 ‘전세형’이라는 신조어도 만들었다. 엄밀히 따지면 정부가 말하는 '전세형'은 전세가 아니라 보증금 비율이 80%인 월세 주택이다.

매매·전세 치솟는 서울 아파트.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매매·전세 치솟는 서울 아파트.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호텔 전세'와 '전세형 주택' 등 신조어와 외계어가 난무하는 부동산 시장의 바벨탑은 더 높아지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소통 불가에 빠진 것은 부동산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이 모두 현실과 동떨어진 탓이다. 오진과 오판에 따른 땜질 처방의 결과물은 국민의 부담과 고통이다. 꼬이고 꼬인 부동산 문제를 풀기 위한 첫걸음은 '우리가 옳고 맞다'는 정신승리가 아니라 정직한 소통이다.

한은화 경제정책팀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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