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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부수도’는 실패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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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

경험 못 한 개표 생중계였다. NHK 화면 상황은 개표율 86%에 찬성 59만2047표, 반대 58만9254표. 중반 이후 박빙의 찬성 우세가 이어졌지만, NHK는 ‘반대 다수 확실’ 속보를 띄웠다. 개표 93% 때는 더 벌어져 찬성이 4716표나 웃돌았다. 긴장을 풀지 못하는 방송 진행자. 하지만 명불허전이었다. 개표가 늦었던 반대 우세 선거구의 NHK 독자 취재가 틀리지 않았다. 결과는 1만7167표의 반대 다수였다. 지난 1일 일본 오사카 부(府)·시(市) 통합안을 둘러싼 시의 주민투표는 극적이었다.

오사카 통합안 주민투표서 또 좌초 #미래 비전보다 불만있는 현실 택해 #분권과 철옹성 타파 결기는 산교훈

통합안은 정령(政令) 지정도시 오사카시 폐지와 24개 시 행정구의 4개 특별구 재편이 골자다. 이른바 오사카도(都) 구상이다. 행정구는 시 내부조직이지만, 특별구는 구청장 직선에 의회를 둔다. 유일하게 특별구(23개)를 둔 도쿄도가 모델이다. 통합의 비전은 부와 시 간 이중 행정 해소와 도시 계획·성장 전략의 일원화다. 정령 도시(20곳)의 자치 권한이 광역단체(47곳)와 맞먹는 데서 오는 폐해를 1인 사령탑으로 없애겠다는 얘기다. 오사카를 부수도(副首都)로 삼겠다는 전략도 담겨 있다. 1956년 정령시 설치 이래 최대의 대도시 리셋 안이자 도쿄 일극(一極)에 대한 야심 찬 도전이다.

하지만 도 구상은 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것도 2015년에 이어 두 번째다. 도 구상은 추진 역인 지역정당 오사카유신회의 원점이다. 당의 지반 침하는 피하기 어렵다. 마쓰이 오사카 시장(유신회 대표)은 임기 만료와 더불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요시무라 오사카부 지사(신임 당 대표)는 “내가 도 구상에 재도전하는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통합엔 자민당·공산당 등 지방 조직이 반대했다. 재점화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개헌 세력 유신회의 좌절은 스가 정권에도 타격이다. 스가 총리와 마쓰이의 친분은 두텁다. 유신회는 스가의 별동대로 불릴 정도다.

주민투표는 현상 변경이 늘 가시밭길이라는 점을 새삼 일러준다. 행정 지도 개편은 더하다. 다수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무엇보다 고도(古都) 오사카시 해체에 대한 알레르기는 강했다. 요미우리신문 출구 조사 결과, 반대 이유는 “오사카시가 없어지기 때문”(34%)이 압도적이었다. 시민에 도시와 함께해온 아이덴티티는 미래 비전보다 값질지 모른다.

서소문 포럼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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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인구의 선택도 주목거리였다. 고령화율 상위 10구가 몰린 남부 14개 구는 반대 다수였다. 상대적으로 젊고 오피스·상업시설이 몰린 북부 10개 구는 찬성 다수였다. 고령화 사회는 불안한 미래보다 불만 있는 현실을 선택하기에 십상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주민투표 결과는 고령자의 정치 영향력이 커지는 실버 민주주의의 승리이기도 하다.

오사카 부·시의 사실상 단일화로 통합의 호소력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2011년 이래 오사카 지사와 시장은 유신회가 장악해 협력해왔다. 하시모토 전 유신회 대표의 진단은 흥미롭다. 이중 행정을 병(病), 부·시 협력을 약(藥), 도 구상을 수술로 비유하면서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처방했더니 나았다. 그러면 수술을 좀처럼 선택하기 어렵다”고 했다. 성과에 희생됐다는 얘기다.

오사카도 구상은 멈췄지만, 의의는 적잖다. 지방이 결기해 행정구역의 철옹성을 깨면서 분권의 새 장을 열려고 했다. 1970~80년대 미노베 도쿄도 지사의 도민당(都民黨) 기치, 나가스 가나가와현 지사의 참가형 분권제에 견줄만한 캠페인이다. 주민투표 제도까지 온 것도 추진 세력의 노력 덕분이다. 여기에 밀려 일본 국회는 2012년 정령시도 특별구를 둘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오사카 부와 시는 현재 기존의 틀 안에서 통합을 모색하고 있다. 대규모 개발 사업과 관광진흥 분야를 부가 맡는 조례를 만들 방침이다. 시의 24개 행정구도 구청장 권한을 늘린 8개 종합구로 재편한다는 생각이다. 결기는 죽지 않았다.

우리도 지금 광역지자체 통합 움직임이 거세다. 대의는 오사카와 오십보백보다. 지방으로부터의 개혁도 같다. 하지만 정치 상황이나 통합 방식은 판이하다. 일본의 광역단체 수장은 무소속이나 정당 연합 공천 인사가 대다수다. 한국의 광역시는 일본식 특별구를 도입한 지 오래다.

요체는 분권적 생활·성장 본위의 행정구역 재편이다. 한계상황에 직면한 지방의, 지방에 의한 현상 타파 움직임은 내전적 중앙집권 정치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정치의 본령은 비전에 대한 도전이 아니던가. 정부는 본사이고, 광역단체는 지사(支社) 격인 구각을 깰 때가 됐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