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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뛴 만화…청송교도소 대도, 한국 최고 제비도 만났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옛날만화 재조명 받는 김성모 작가 #2002년 연재한 ‘대털’ 다시 패러디 #“내 만화는 80~90년대식 극화체 #스토리 쓰려 현장 찾아 얘기 들어”

2002년 만화가 김성모(51) 작가가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대털’에 등장하는 이 문장이 여러 광고는 물론 홍보 영상, 채용 공고문에까지 쓰이고 있다. 시대를 건너뛰어 온라인 시대 ‘밈’(meme·화제가 되는 콘텐트를 인터넷상에서 패러디하며 갖고 노는 현상) 문화와 결합해 날개를 단 것. ‘럭키짱’ ‘용주골’ 등 김 작가의 히트작도 재조명되는 분위기다. 16일 부천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성모 작가는 ’내 작품은 인간의 절망, 좌절 거기서 피어오르는 희망, 도전, 성공, 또 파멸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성모 작가는 ’내 작품은 인간의 절망, 좌절 거기서 피어오르는 희망, 도전, 성공, 또 파멸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더 이상의 … ”란 대사는 어떻게 나왔나.
“범죄에 이용되는 적외선 굴절기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걸 설명하려다 ‘어, 이거. 누가 만들 거 아니야’ 싶었다. ‘더 이상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라고 적고는 마땅히 넣을 그림이 없어 주인공 얼굴을 넣었다.”
꼼꼼한 취재력으로 유명한데.
“‘빨판’이라는 제비족 만화를 그릴 때는 여성 1500명을 농락한 한국 최고 제비를 만났다. 삼정호텔 ‘돈텔마마’라는 클럽에서 만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한 번 배워보겠다’고 했다. 온갖 기술을 배웠다. 지금 뛰어도 자신 있다.(웃음) 건달을 취재하고 싶으면 (내가) 건달이 된다. 사채를 소재로 (작품을) 해볼까 하고는 5000만원 빌려서 안 갚아 봤다. 얼마나 위험했겠나. 주로 건달이나 호스티스, 사채업자, 강도 이런 사람들 취재하다 보니 칼도 많이 맞아보고…. 내 외관이 정상 같지만 뼈도 많이 부러지고 날이 추워지면 시리다.”
범죄자를 취재하면서 감방 영치금도 내줬다고 들었다.
“범죄자들은 밖에서 물어보면 귀찮으니까 잘 만나주지 않는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가면 도망갈 데가 없다. ‘징역 수발해줄 테니 당신의 일대기를 써봐라. 기술도 써봐라’하고 제안하면 ‘신경 써주니 고맙다’면서 성심성의껏 응해준다.”
‘대털’도 그렇게 취재했나.
“보통 ‘대도’라고 하면 조세형을 치는데, 누군가 ‘진짜’는 따로 있다면서 ‘김강룡’을 만나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청송교도소로 찾아갔다. 그가 법원에 제출하려고 과거 행적을 써놓은 것이 있더라. ‘1000만원 줄 테니 주십쇼’하고 갖고 왔다. 거기서 기술을 많이 배웠다. 예전에 아파트 현관문에 우유통을  통해 기계를 넣고 모니터로 보면서 문 여는 범죄가 있었다. 그게 제 만화에서 나오고 1주일 만에 (사건) 기사가 터져서 난리가 났다.”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가 등장한 ‘대털’의 장면 . [유튜브 캡처]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가 등장한 ‘대털’의 장면 . [유튜브 캡처]

매춘을 다룬 작품 ‘용주골’ 작업을 위해 그는 두 달 정도 용주골에서 살기도 했다. “스토리는 작가가 직접 들어야 한다. 사업 망한 사람으로 위장해 숙박업소에서 두 달간 업소 여성, 포주, 건달들과 얘기하며 산 뒤 ‘용주골’을 냈는데 대박이 났다. 최고 히트작이다. 10만부 이상 나갔다.”

대개 사회 밑바닥에서 올라와 성공하는 남성을 그렸다. 본인의 결핍이 반영된 건가.
“내 인생이 그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도망갔다. 배고파 못 살겠다고. 그해 아버지가 파출소에 잡혀갔다. 돌봐줄 사람도, 먹을 것도 없었다. 동생들과 전략을 짰다. ‘2주는 버텨야 한다.’ 동선을 짜고 수퍼에서 라면을 들고 도망쳤다. 잡힐 걸 안다. 골목의 코너를 돌면서 3개를 건너편에 던진다. 그럼 담 옆에 대기하던 동생들이 그걸 받아 집에 가고 나는 나머지만 갖고 잡힌다. ‘아저씨 잘못했어요’라고 빌고 맞다가 집에 와 끓여 놓은 라면을 먹었다. 내 만화엔 엄마가 안 나온다. 아버지만 나온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식 셋을 혼자 키웠다. 2평짜리 골방에서 4명이 살았는데 아침마다 밥을 해 먹였다. 소풍날이면 어디서 (돈을) 빌렸는지 과자 담은 비닐봉지를 줘서 보내고, 저녁엔 칼국수를 해줬다. ‘절대 기죽지 마라’고 교육했다. 인생에서 아버지에게 배운 게 정말 많다. 어떻게 아버지를 욕하겠나. 아버지 같은 사람을 나는 인생에서 본 적이 없다.”
80~90년대 스타일 극화체를 고수하는데.
“단언컨대 만화를 이끄는 건 극화체다. 극화체는 사람의 체형이나 배경, 스토리를 사실적으로 만든다. 나는 작품에서 인간의 절망, 좌절 그리고 거기서 피어오르는 희망, 도전, 성공, 또 파멸의 이야기를 그린다. 대중은 그런 스토리에 열광한다.”
그런데도 다른 극화체 작품이 안 나오는 이유는.
“다른 작화보다 시간이 두 세배 걸린다. 예전엔 문하생들이 있었지만 요즘 신인 작가들은 1주일에 한 편씩 혼자 마감한다. 문하생 시절 선배들이 만든 것을 보며 똑같이 해보고, 데생도 따라 하고…. 좋은 원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3분의 1은 는다.”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나.
“2018년 ‘트레이싱’ 사건이다. (2018년 네이버 웹툰에 연재한 ‘고교생활기록부’가 일본 만화 ‘슬램덩크’ 작화를 따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김 작가는 인정했다) 쌓아놓은 게 다 무너졌다. 문하생이 그랬다고 고백했는데 어쩌겠나. 지금도 같이 일한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하고. 그 이후 매일 연재를 결심했다.”
연재를 쉬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독자들에게 나, 양아치 아니다. 진짜 만화가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 보여주려 했다. 당시 네이버에 ‘고교생활기록부’를, 카카오페이지에 ‘고교권왕’을 연재했는데 한 달에 마감을 40번 했다.”
인생의 최종 목표는.
“천하 제패다. 극화체로 일본의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우뚝 서는 작품을 내고 싶다. 몰빵을 해서라도….”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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