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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경계한 위안스카이, 펑더린 이용해 견제 시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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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2〉

마적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다시 경찰로 태어난 왕년의 마적들. 1918년 펑톈(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마적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다시 경찰로 태어난 왕년의 마적들. 1918년 펑톈(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마적에서 출발했다. 지방군대의 지휘관이 되기까지 온갖 모욕을 삼키고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동3성에는 마적 두목에서 정규군 지휘관으로 변신한, 장쭤린 같은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1907년 봄, 8명이 삼국지의 도원결의를 흉내 냈다. 출신은 마부, 공사판 노동자, 두부장수, 목동, 벽돌공장 인부, 수의사 등 다양했지만, 본업 걷어치우고 마적으로 성공한 당대의 괴짜들이었다. 나이순으로 형 동생을 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석이라면 모를까 형제 서열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셋째 펑더린(馮德麟·풍덕린)과 일곱째 장쭤린의 세력이 컸기 때문이다.

사단장 동시 임명해 경쟁 부추겨 #장쭤린, 단순했던 펑더린 역이용 #여론 유리하게 이끌고 위상 다져 #반전 노린 펑더린 ‘복벽운동’ 가담 #실패로 끝나 지휘권 넘기고 은퇴

과부의 은혜, 평생 잊지 않은 장쭤린

왕융장은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장쭤린이 관상의 대가에게 봐 달라고 보내는 바람에 독사진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왕융장은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장쭤린이 관상의 대가에게 봐 달라고 보내는 바람에 독사진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세상일이 다 그런 것처럼, 펑더린과 장쭤린의 인연도 시작은 우연이었다. 장쭤린이 젖비린내 풍길 때부터 펑의 마적단은 랴오시(遼西)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건장했던 애마가 비실대자 용한 수의사를 물색했다. 펑은 부하가 데리고 온 자그마한 체격의 수의사가 맘에 들었다. 틈만 나면 말 치료 핑계로 놀러 갔다. 가끔 먹을 것 사주고 말 치료비도 후하게 줬다. 이웃 마을에 사는 쑨(孫·손) 과부를 깍듯이 모시는 것 보고 감탄했다.

장쭤린의 일화에 쑨 과부는 빠지는 법이 없다. 13살 때 부친이 도박장에서 맞아 죽자 장쭤린은 갈 곳이 없었다. 항구도시 잉커우(營口) 주변을 발 닿는 대로 떠돌아다녔다.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다. 한번은 3일간 기웃거려도 강냉이 한 톨 주는 집이 없었다. 마침 보리 수확기였다. 큰 농사짓는 집 앞에는 밥때마다 일꾼들이 들끓었다. 장쭤린은 일꾼들 틈에 섞여 밥을 먹고 사라졌다. 몇 날을 그러다 보니 들켜버렸다. 일꾼들에게 밥 도둑놈이라며 두들겨 맞았다. 문전이 워낙 시끄럽다 보니 집주인이 뛰쳐나왔다.

한 차례 암살을 모면한 장쭤린의 경호는 삼엄하기보다 살벌했다. 수제 방탄차에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설치했다. [사진 김명호]

한 차례 암살을 모면한 장쭤린의 경호는 삼엄하기보다 살벌했다. 수제 방탄차에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설치했다. [사진 김명호]

집주인은 소문난 부자였다. 세상 떠난 남편의 성을 따라 다들 쑨 과부라고 불렀다. 쑨 과부는 소년을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온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사경을 헤매는 소년을 며칠간 보살폈다. 기력을 회복한 장쭤린은 쑨 과부에게 평생 어머니로 모시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꼴이 꼴이다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장쭤린은 쑨 과부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동북왕 시절은 물론 북양정부 원수로 부임할 때도 문전을 지나치지 않았다. 쑨 과부의 마지막 길도 평복으로 참석해 곡을 했다. 쑨 과부는 겸손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별명이 동3성 황태후(東三省皇太后)라는 것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펑더린은 장쭤린보다 늦게 청나라에 귀순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장쭤린을 경계했다. 27사단장에 임명하면서 펑더린에게도 28사단의 지휘를 맡겼다. 둘을 서로 감시하고 경쟁하게 할 생각이었다. 장쭤린은 여론을 조성하고 펑을 부추겼다. 펑은 의협심만 많았지 단순했다.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펑톈장군(奉天將軍) 돤즈꾸이(段芝貴·단지귀)를 위협했다. 생명에 위험을 느낀 돤은 장쭤린에게 매달렸다. 장은 돤을 죽여버리겠다는 펑을 진정시켰다.

장쭤린의 도움으로 가산까지 챙겨 톈진(天津)에 도착한 돤은 위안스카이에게 펑더린을 험담했다. “위험한 인물이다. 언제 마적 근성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장쭤린은 충성심이 강하다. 독군(督軍)에 임명하고 펑더린을 부독군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동3성의 안정을 보장 못 한다.” 베이징의 통보에 울화가 치민 펑더린을 장쭤린이 달랬다. “독군이면 어떻고 부독군이면 어떻습니까? 장군은 저의 셋째 형님입니다. 같이 의논하고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천대받던 ‘천하의 기재’ 한 눈에 알아봐

장쭤린의 원배(原配)부인 자오춘꾸이(趙春桂). 왼쪽이 장남 장쉐량. 왼쪽 둘째가 장녀 쇼우팡(首芳). 오른쪽은 차남 쉐밍(學銘). [사진 김명호]

장쭤린의 원배(原配)부인 자오춘꾸이(趙春桂). 왼쪽이 장남 장쉐량. 왼쪽 둘째가 장녀 쇼우팡(首芳). 오른쪽은 차남 쉐밍(學銘). [사진 김명호]

1917년 7월 1일 새벽 1시,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전 강남제독 장쉰(張勛·장훈)이 지휘하는 변발군(辯髮軍)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3시간 후 공화제 폐지와 폐제(廢帝) 푸이(溥儀·부의)의 황제 복위를 선언했다. 동3성의 실력자 장쭤린과 펑더린에게도 베이징에 와서 복벽(復辟)에 참여해달라는 전문을 보냈다. 청나라와 인연이 깊었던 장쭤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펑은 장쭤린이 쥐고 있던 펑톈독군직을 탈취할 기회라고 오산했다. 장쉰의 복벽운동은 12일 만에 물거품이 됐다. 쓴잔을 마신 펑더린은 28사단의 지휘권을 장쭤린에게 이양하고 은퇴했다. 펑더린의 실패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세를 읽는 정치적 판단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았다. 밑에 사람 안 믿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오만의 결정체였다.

장쭤린은 달랐다. 지략과 모략이 뛰어나고, 가는 곳마다 냉대받던 천하의 기재(奇才) 왕융장(王永江·왕영강)을 한눈에 알아보고 곁에 뒀다. 다섯째 부인 장쇼이(張壽懿·장수의)도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장쇼이는 흑룡강 장군 쇼산(壽山·수산)이 친구 부인을 슬쩍해서 태어난 딸이었다. 장쭤린 급서 후 28세의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동3성의 대권을 장악한 것은 순전히 장쇼이 덕분이었다. 왕융장은 동3성을 군수산업 위주의 중공업 기지로 만들고, 경찰제도를 확립시켰다. 경제개혁과 인재양성도 왕융장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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