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집 『안녕』 쓸 때 ‘야, 그만 쓰자’ 했던 이유엔 ‘언제까지 첫사랑 팔아먹고 살래’ 이런 것도 있었어요. 이번에 18년 만에 쓰면서도 내가 옛날처럼 써도 웃기는 것 아니냐, 생각했죠.”
1992년 첫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생각을 해』,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등 90년대 펴내는 시집마다 100만부 넘게 팔리며 ‘사랑 시’로 인기 누린 원태연(49)이 18년 만에 새 시집으로 돌아왔다. 기존 대표시 70수에 새로 쓴 30수를 더해 지난 10일 낸 필사시집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북로그컴퍼니)다. 2002년 시집 『안녕』을 끝으로 “시인이길 포기했던” 그다. 시 쓰는 고통을 잊고 너무 쉽게, 기계적으로 쓰는 자신을 발견하고 괴로웠던 것도 이유였다. 이후 권상우‧이보영 주연 멜로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2009)의 각본을 겸해 연출 데뷔한 영화감독으로, 유미의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샵 ‘내 입술...따뜻한 커피처럼’, 백지영 ‘그 여자’, 허각 ‘나를 잊지 말아요’ 등 히트곡 작사가로 활동반경을 넓혔던 그는 드라마 작가에도 도전했지만, 지난해 고배를 맛봤다.
1990년대 밀리언셀러 시인·작사가 원태연 #18년 만에 새 시집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18년 만에 시인 복귀 "다시 찾은 나"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를 찾은 그는 18년 만의 시인 복귀를 “다시 찾은 나”란 말로 함축했다.
- 어떻게 시로 돌아왔나.
“2년 반을 준비해온 드라마가 지난해 무산됐다. 선금으로 받은 집필료 중 일부를 제작사에 돌려줘야 했는데 그 액수가 상당했다. 그즈음 시집을 내보자는 출판사에 ‘이번 주 안에 얼마 주시면 8월 안에 시를 써드린다’고 했더니 그 양반이 7월 안에 써주면 오늘 준다더라. 그게 4월 말이었다. 다 쓰는 데 두 달 반 걸렸다. 그동안 시를 한 편도 안 썼다니까 거짓말인 줄 알더라. 그때부터 반성 모드였다.”
그는 “멋있게 컴백하고 싶었는데 정반대 상황에서 시를 쓰는 내가 우스워 보였지만 그나마 독자들한테 결례를 안 하는 방법은 옛날에 썼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면서 “그 느낌을 잡는 게 한참 걸렸다”고 했다. “대본 쓰고 가사 쓸 때 하도 ‘컨펌’을 받다 보니 내가 나를 안 믿게 돼 버렸다. 문체가 엉망진창이 돼있었다”고 돌이켰다. 또 “그냥 뭐 없어질 뻔한 존재였는데 뭐가 창피해, 이러면서 쓰고 있다”고 시작(詩作)의 의지를 내비쳤다.
시 쓰는 법 생각 안 나 무서웠죠
18년 만에 쓴 첫 시가 가장 어려웠다. ‘너무 사랑했다/그래서 니가 난 줄 알았다’로 시작하는 시 ‘울지 못하는 아이’다. “정말로 무서웠어요. 시를 어떻게 쓰는지 생각 안 나서. 왜 간판 보면 로또 당첨번호가 쫙 지나가듯이 다는 아니지만, 옛날엔 시가 그렇게 보였거든요. ‘울지 못하는 아이’는 그렇게 보이는 걸 그대로 써놓고 보니까, 이상한 거예요. 공포가 확 왔죠.” 마음을 다잡고서 30편을 다 써놓곤 “그저 감사했다. 이 정도면 모양은 안 빠지겠구나, 일단 살았다 싶었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말을 걸듯 쉬운 일상용어로 쓴 그의 시는 문단에선 외면받았지만 대중적 사랑을 누리며 ‘원태연 풍’ 아류작까지 양산한 터다. 이번 신작은 그런 감성을 되살리되 유독 이별 후를 그린 것이 많다. ‘사실 난 나를 잘 모르거든…… 그래서 니가 날 좀 읽어줬으면 좋겠어……//천천히/오래오래/또박, 또박’이라 쓴 시 ‘사랑이란 2’는 오랜만에 재회한 독자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욕먹은 시인
그는 스물여덟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첫사랑 감성을 어떻게 유지했냐는 질문엔 “유지가 아니라 이젠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라고 대답했다.
“제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욕먹은 시인이잖아요.” 그는 “비난과 찬사를 함께 받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원태연’이 돼버렸다”면서 “‘선생님’ 소리를 스물둘부터 들었다. 시도, 노래 가사도 쓰기만 하면 히트하는 줄 알고 겸손의 뜻을 몰랐다. 그 예전의 내가 지금은 창피하다”고 돌이켰다. 다만, 자신의 시에 대한 문단의 저평가에 대해선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말했다.
50대의 시 "멋있는 남자의 시 되길"
시를 쓰지 않을 때도 ‘시팔이’를 자처한 후배 시인 하상욱의 짧은 시를 즐겨 읽었다며 “내가 시집 돈 주고 산 게 그 친구 『서울시』가 처음이다. 시가 재밌으면 만화책보다 더 재밌는데 그 친구 정말 감각적이다”라 감탄했다.
”
- 내년이면 쉰이다. 50대 원태연의 시엔 무엇을 기대하나.
“나도 궁금하다. 근사했으면 좋겠다. 철딱서니 없고 오글거리는 남자애가 쓰는 게 아니라 멋있는 남자가 쓰는 시.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멋있는 남자? 자신감 있고, 배려할 줄 알고, 웃기는 남자지. 우리 아버지랑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를 함께한) 내 친구 이모개 촬영감독이 제일 근사치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