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영남의 '이주일을 추모하며']

중앙일보

입력

그게 몇 달 전이었습니까. 형이 폐암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는 뉴스가 나간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대로 영영 떠나시는 겁니까.

나는 그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형이 워낙 건강한 사람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랑이 아니라 형의 건강을 저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우리가 북창동 근처에 있던 밤무대에 함께 설 때부터 형은 시종 - 말 그대로 시종이었습니다 - 입원하기 직전까지 앉으면 하는 소리가 "야! 영남아. 술 좀 시켜라"였습니다. 그리고 형은 다음 장소와 다음 스케줄로 옮겨가기 전까지 그냥 술을 무차별로 마셨습니다.

그래도 끄떡없었습니다. 게다가 담배는 또 얼마나 연신 피워댔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저는 형이 고등학교 때 박종환 감독과 함께 축구를 했다는 소리는 진작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형의 발놀림이 정말 대단하다는 건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알았습니다.

형이 의자에 앉은 자세로 서있는 불량배의 관자놀이를 오른발로 올려차 단 한방에 쓰러뜨리는 광경을 제가 옆에서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아! 그때 형이 제 옆에서 무언으로 "영남아 너 봤지?"하며 으스대던 장면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과장이 아닙니다. 형의 건강은 실로 무적이었습니다. 그 옛날 여름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조용필과 함께 밤새 소주를 마시고 산발을 한 채 모래벌 한 가운데 쓰러져 아침 산책을 하던 사람들로부터 '노숙자냐 유명 연예인이냐' 하는 논쟁을 일으키게 했던 사건 하며, 형이 술에 취해 한층 아래 아파트로 잘못 찾아 들어가는 바람에 그 집 식구들이 강도 들어온 줄 알고 안방에 몰려 이불을 쓰고 벌벌 떨었다던 일화들은 지금도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형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물론 입원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이 아연 긴장했다는 사실이 저를 놀라게 한 겁니다. 그것은 제 오십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10여년 전 옆나라 일본으로부터 미소라 히바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가수의 사망이 일본 열도를 일제히 침묵으로 몰아갔다는 얘기는 건성건성 남의 나라 얘기로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당장 그와 같은 믿어지지 않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정녕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형이 '수지-큐'를 부르며 오리 궁둥이 흉내를 낸 건 그 자체가 벌써 찰리 채플린 이상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형이 발기조차 될 성싶지 않은 나이 든 사람들과 힘을 합쳐 진짜 '창당 발기'도 하고, 그래서 형의 그 얼굴과 그 실력으로 국회 의사당까지 들어가셨으니 형은 뭔가를 충분히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형의 7대 독자 외동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을 때 의연하게 대처하신 것도 뭔가를 크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형이 병석에 누워서 온 국민에게 '담배 좀 끊으십시오' 한마디 한 것은 정녕 나라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신 겁니다. 세상에 한 인간이 그보다 더 뭔가를 많이 보여주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형은 단군 이래의 신화가 되어버린 2002년 월드컵을 보고싶다고 희망했고 그 희망대로 월드컵 현장에 직접 나가서 봤습니다. 뭘 더 바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냥 하는 말에 '인생은 짧고 굵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은 달랐습니다. 형의 인생은 질투가 날 만큼 '굵게 또 굵게'였습니다. 줄잡아 형의 40년 연예생활을 통틀어 20년은 바닥에, 다른 20년은 최정상에 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쓴맛 단맛을 다 보신 겁니다. 월드컵 4강까지 보게 된 형은 정녕 최후의 승자이십니다.

이젠 가셔도 됩니다. 우리도 서서히 준비하겠습니다. 형은 우리로 하여금 상당 부분 떠날 준비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산 사람에게는 죽음 이상의 교훈이 없는 법입니다. 이제 고유의 말투로 남은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한마디로 우린 형을 그리워해야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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