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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오페라 속에 연극이 오버랩되는 묘한 오페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37) 

1892년 발표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는 프롤로그와 2막으로 구성된 베리스모 오페라입니다. 그는 기존의 신화나 귀족적인 모습을 다루던 일반적인 오페라에서 벗어나 고통스런 생활을 하던 하층민의 삶을 묘사했습니다. 욕망과 집착으로 갈등하고 끝내 배신과 치정 살인으로 비극에 빠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요.

오페라 속 비극적인 현실이 그려지고 다시 극중극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현실과 오페라, 그리고 오페라 속 연극으로 이어지는 묘한 여행을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답니다. 심지어 오페라의 스토리와 오페라 속 극중극의 내용이 유사해 주인공이 자신의 현실을 연극과 착각하게 되므로, 관객은 손에 땀을 쥐고 긴장하며 빠져들게 되지요.

이 오페라에서는 새처럼 자유로운 사랑을 찾는 여인과 그녀에 대한 광기 어린 질투가 끔찍한 비극으로 마무리되지요. 질투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그저 분노조절 장애이고 법적으로는 형사처벌을 받는 범죄일 뿐입니다. 허나 오페라에서는 비극이 발생된 전후 스토리와 파국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심리까지 관객에게 날 것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지요. 그리고 레온카발로는 이 오페라 한 편으로 역사에 남는 작곡가가 되었답니다.

광대들의 삶. [사진 Flickr]

광대들의 삶. [사진 Flickr]

길 위에서 굶던 어린 넷다는 그녀를 보살펴준 유랑극단장 카니오의 아내가 되지만 그를 사랑한 적은 없답니다.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는 실비오와 새로운 생활을 꿈꾸면서 비극은 잉태되지요.

집시처럼 자유로운 사랑을 원하는 넷다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노래하는 새를 찬미하는 아리아를 부릅니다. 이때 단원 토니오가 넷다에게 다가오며 자신에게도 꿈과 욕망이 있고 두근거리는 심장도 있다며 외로운 사랑을 노래합니다.

허나 이미 관객으로 만난 실비오에게 마음이 가 있는 넷다는 그의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지요. 그럼에도 억지로 욕정을 채우려 덤벼드는 토니오를 그녀가 채찍으로 때리며 거부하자, 그는 분한 마음에 복수를 결심합니다.

카니오를 피해 실비오가 넷다에게 나타나는데, 이제 곧 축제가 끝나면 유랑극단이 떠나게 되니 함께 도망가자는 실비오의 제의에 넷다는 주저하다가 결국 그렇게 하기로 합니다. “나는 이제 영원히 당신의 여자예요”라고 노래하지요. 이들의 사랑 노래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들이 불륜이라는 사실마저 잊게 만든답니다.

허나 하필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토니오가 카니오에게 고자질하자 결국 실비오는 도망가고 넷다는 추궁을 받게 됩니다. 칼을 들이대며 도망간 녀석의 이름을 실토하라며 카니오가 흥분하지만, 관객이 오고 있으니 일단 공연준비를 하자며 다른 극단원이 말리지요.

의상을 차려입고 분장을 하면서 울분을 터뜨린 카니오는 아내의 불륜을 알고도 같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광대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를 눈물로 부른답니다. 이 오페라에서 제일 유명하고, 베리스모 오페라 특유의 슬픔과 비극의 감정을 제대로 보여주는 아리아지요.

의상을 입어라 분장도 해라.
아내를 빼앗겨도 웃어라.
그래야 관객이 박수를 친다.
나는 광대다…

절규하는 그의 아리아가 클라이맥스를 이루며 1막이 내려집니다.

카니오의 아리아가 끝나고도 오케스트라 연주는 한참이나 계속되는데요, 아마도 레온카발로는 카니오에게 격해진 감정을 추스릴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 같군요. 카니오의 비탄에 빠진 모습을 눈 크게 뜨고 긴장하며 바라볼 관객에게도 숨돌릴 시간이 필요했는지, 이어지는 간주곡은 비장함을 덜고 좀 더 차분하게 이어집니다.

2막이 열리고 유랑극단의 극중극이 시작되는데, 공교롭게도 1막의 스토리와 같은 내용입니다. 내연남이 극중 부인과 다정하게 식사를 하면서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함께 도망가자고 합니다. 극중 부인은 “나는 이제 영원히 당신의 여자예요”라는 대사까지 한답니다.

카니오는 그 과정을 지켜 보다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무대에 올랐는데, 하필 극중 상황도 극중 부인과 같이 있던 남자가 누구냐며 추궁하는 장면이네요. 극중 관객은 재미있다며 웃지만,그 웃음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오해한 카니오는 흥분해 연극과 현실을 혼동하기 시작합니다.

같이 히히덕거리던 놈이 누구야, 어떤 녀석이냐구? [사진 Flickr]

같이 히히덕거리던 놈이 누구야, 어떤 녀석이냐구? [사진 Flickr]

결국 이성을 잃은 카니오는 넷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배신으로 인한 고통을 토해냅니다. 결국 더러운 창녀 운운하며 비통해할 가치도 없는 여자라고 저주하고 내연남의 이름을 대라며 추궁하는데, 극중 관객은 연기를 사실적으로 잘한다고 감탄하며 박수를 치는 상황이랍니다.

카니오는 진짜 남자를 고백하라고 칼을 들이대며 위협합니다. 넷다는 오히려 “나의 사랑은 당신의 증오보다 크다”며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달라며 저항하지요. 분노한 카니오는 결국 그녀를 찌릅니다. 넷다의 비명소리에 객석에 있던 실비오가 그녀를 구하려 무대에 오르지만, 그는 “네 놈 이었구나”하며 그마저 찌르지요. 그는 칼을 떨어트리며 “연극은 끝났다”고 외치고, 치열한 애증의 막이 내려집니다.

어느 철학자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일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넷다나 카니오처럼 삶에 지친 사람에게 사랑은 더욱 필요한 것이겠지요.

절망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이 영원한 사랑을 함께 그려갈 수는 없었을까요? 우울과 권태라는 죽음의 에너지가 흐르는 넷다에게 새처럼 날아올라 꿈을 꿀 수 있도록 카니오가 좀 더 넓은 가슴을 내어주었더라면 그녀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을까요…?

‘팔리아치’에서 화려한 분장속 배우들의 상처 입은 영혼은 관객들에게 ‘연극은 끝났지만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정신의 카오스 상태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있는 듯 하네요.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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