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 공천 방침 결정은 전격적이었다. 방침을 공식화하는 시기 선택과 당헌 개정이라는 방법이 정치권 안팎의 예상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지난달 23일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여론뿐 아니라 집권 여당으로서 어떤 것이 책임 있는 처신인가가 중요한 고민이 될 것”이라며 “공천할 것인지 늦지 않게 책임 있게 결정하겠다”고 말한 뒤 관련 언급을 삼가왔다.
공천 방침 자체는 이 대표 주변의 말들에서 예측됐지만 전당원투표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도입한 당헌까지 깨겠다고 나선 건 이미 정해진 답은 아니었다. 이 대표의 한 측근 인사는 “공천 방침 자체에 대해선 공감대가 있었지만 당헌 개정을 결심한 건 이 대표”라고 말했다.
민주당 당헌 96조 2항엔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해 재·보궐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후보자를 추천하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민주당 소속 인사들의 '중대한 잘못'으로 치러지는 보궐선거 승패에 대선 주자로서의 명운이 걸린 이 대표가 당헌을 그대로 둔 채 후보를 내는 샛길 대신 당헌 개정 후 공천이라는 정면 돌파를 택한 셈이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이 대표가 의원단에 “후보 추천의 길을 열 수 있는 당헌 개정 여부를 전당원 투표에 부쳐 결정하겠다”고 말한 건 지난 29일 온라인 의원총회에서였지만 지도부와 이같은 입장을 공유한 건 전날 비공개 최고위원회에서였다. 이 대표는 이 자리에서 “보궐선거에 공천을 해야 한다. 당헌 개정도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한 최고위원은 “공천을 해야 한단 분위기는 암묵적으로 공유돼 있었지만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던 상황에서 이 대표가 시작과 끝을 한 번에 정리한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29일 의총에서 공천 방침의 명분에 대해 “후보자를 내지 않는 것만이 책임 있는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후보 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책임 있는 공당의 도리라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입장 정리는 세밀한 당내 여론 청취의 결과라는 게 이 대표 주변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국정감사(10월 7~26일) 기간 틈틈이 최고위원과 측근 인사, 주요 당직자를 개별적으로 만났다. 한 지도부 인사는 “이 대표가 ‘무엇을 중요하게 봐야하나’고 묻길래 ‘후보를 내는 게 정당 의무이고 후보를 안 내면 유권자 권리를 침해하는 거다. 담대하게 결정하시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민주당 관계자는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발표 시기와 방법론에 대해선 이견도 적지 않았다. 일부 인사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야당 후보가 나오는 연말까지 기다렸다가 ‘어쩔 수 없다’며 우리 당 후보를 내자”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그때 돼서 후보를 낸다고 하면 비판을 더 신랄하게 받고 국민들도 진정성이 없다고 볼 것”이라며 ‘국감 종료 직후’로 시기를 정했다고 한다. 12월 8일부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는만큼 11월 내 공천작업을 마무리 해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도 컸다.
“당헌 놔두고 공천” 일부 주장에 이 대표 “고치는 게 낫다”
일부 당내 인사들은 이 대표에게 “굳이 당헌을 바꿀 필요 없다. 논란만 가중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당 혁신 차원에서 도입한 조항이라 개정이 부담스럽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대표는 “공천을 하려면 고치는 게 낫다. 깔끔하게 개정하자”고 논의를 정리했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여론에 얻어맞더라도 지금 맞아야 선거 준비에 차질이 덜 할 것이라는 게 이 대표의 판단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별도의 후보 검증위원회를 설치해 서울·부산 시장 주자들의 성비위·다주택 문제를 샅샅이 살피겠단 방침도 정했다. 민주당 핵심 의원은 “성비위는 서류상으론 보이지 않는다. 후보 주변을 탐문하는 방식으로 검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들은 30일에도 이 대표의 결정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자당 출신 단체장들의 잘못으로 재보궐선거가 생기면 후보를 추천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들의 당헌이고 누가 요구한 게 아니다”라며 “후보를 내지 않는 게 가장 제대로 된 사죄이고 국민에게 용서받는 일”이라고 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문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 만들어진 규정이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대표 시절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의 같은 행태를 ‘후안무치’라 비난했다”며 “두 전직 대표의 책임정치를 곡해하고 내로남불의 덫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신지혜 기본소득당 대표는 “정치를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로 만들어버린 격”이라고 주장했다.
김효성 기자 kim.hyos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