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행기는 탔지만, 목적지는 없다···완판된 9만9000원 여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제주항공 '인천 to 인천' 관광비행 승객들이 23일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에서 B737-800NG 항공기에 탑승해 이륙 전 항공권을 보이며 즐거워하고 있다.   이날 제주항공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내 상공을 선회한 뒤 복귀하는 관광비행을 진행했다. 공항사진기자단

제주항공 '인천 to 인천' 관광비행 승객들이 23일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에서 B737-800NG 항공기에 탑승해 이륙 전 항공권을 보이며 즐거워하고 있다. 이날 제주항공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내 상공을 선회한 뒤 복귀하는 관광비행을 진행했다. 공항사진기자단

“코로나19 때문에 외할머니가 계신 예천(경북)에 못 가는데 비행기가 예천 하늘을 지난다고 해서 비행기를 탔어요.”(초등학교 5학년 윤하은 양)

[타봤습니다] 국내 항공사 첫 일반인 대상 목적지 없는 비행

“결혼한 지 38년, 속 많이 썩였던 아내 생일을 맞아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어 하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익명을 원한 승객)

23일 관광비행에 나선 탑승객이 기내에서 엽서에 작성한 사연들. 사진 제주항공

23일 관광비행에 나선 탑승객이 기내에서 엽서에 작성한 사연들. 사진 제주항공

23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제주항공 7C380 항공기 안. 기내 방송을 통해 승무원이 엽서에 적힌 탑승객의 사연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제주항공이 국내 항공사 가운데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기획한 ‘종착지 없는 비행’의 기내 프로그램 중 일부다. 대만이나 일본 등 해외 다른 나라에서 일부 종착지 없는 비행을 시행해 화제를 모으긴 했지만, 국내 항공사 중 이런 프로그램을 만든 건 제주항공이 처음이다.

이날 오후 4시 3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B737-800 항공기엔 이렇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승객 121명이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며, 비행시간 내내 손뼉을 치고 함께 웃었다. 덕분에 1시간 30분가량 비행시간 동안 기내는 떠들썩했다. 사연 소개에 더해 승무원의 마술쇼, 퀴즈, 게임, 럭키 드로우 이벤트 등이 쉼 없이 이어졌다. 이날 생일을 맞았다는 한 승객의 사연이 소개되자 다른 탑승객들은 생일축하 노래 떼창으로 생일을 함께 축하했다.

제주항공 '인천 to 인천' 관광비행 승객이 23일 기내에서 승무원의 마술 공연을 보고 있다. 공항사진기자단

제주항공 '인천 to 인천' 관광비행 승객이 23일 기내에서 승무원의 마술 공연을 보고 있다. 공항사진기자단

학생 34명과 함께 관광비행에 나선 강민승 장안대학교 항공관광과 교수는 “항공사 취업을 원하는 학생들이라 직·간접적으로 비행 체험을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신청했다”면서 “항공 산업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제주항공 '인천 to 인천' 관광비행 승객들이 23일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탑승게이트에서 탑승 수속을 하고 있다.   이날 제주항공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내 상공을 선회한 뒤 복귀하는 관광비행을 진행했다. 공항사진기자단

제주항공 '인천 to 인천' 관광비행 승객들이 23일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탑승게이트에서 탑승 수속을 하고 있다. 이날 제주항공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내 상공을 선회한 뒤 복귀하는 관광비행을 진행했다. 공항사진기자단

해외여행 갈증 소비자 저격…좌석 완판

이 관광비행 상품의 가장 큰 특징은 목적지가 없다는 점이다. 이번 한 시간 반의 비행은 인천공항을 출발해 군산ㆍ광주ㆍ여수ㆍ예천ㆍ부산ㆍ포항 등 국내 주요 도시의 하늘 위를 난 후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콘셉트다. 탑승료는 일반석이 9만9000원, 비즈니스석(12석)은 12만9000원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해외여행에 갈증을 느끼는 소비자가 몰리면서 준비된 좌석은 '완판'됐다.

코로나19와 관련한 사회적 거리 두기도 잊지 않았다. 제주항공 측은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3인석에 2명만 탑승토록 하면서 이번 비행에선 실제 가용 좌석(174석)보다 줄어든 121석만 운영됐다.

기내에서 만난 제주항공 오성미(34) 사무장은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휴직에 들어갔다가 7개월 만에 비행에 나선다”며 “특별한 하늘 여행을 시작한 만큼 항공업계가 되살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비행에 앞서 인천국제공항 제1 여객터미널은 100여명의 승객이 탑승객 발권을 위해 길게 줄을 서면서 모처럼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지난달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한 국제선 이용객은 전년 같은 달보다 96.4% 감소한 19만 6864명을 기록했다.

23일 제주항공 '인천 to 인천' 관광 비행 승객들이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에서 B737-800NG 항공기에 탑승해 이륙 전 손을 흔들고 있다. 공항사진기자단

23일 제주항공 '인천 to 인천' 관광 비행 승객들이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에서 B737-800NG 항공기에 탑승해 이륙 전 손을 흔들고 있다. 공항사진기자단

“비행기 내 결혼식, 동창회도 가능해질 것”

제주항공을 시작으로 아시아나항공도 24일과 25일 종착지 없는 비행 상품 운용에 들어간다. 아시아나항공의 A380 여객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출발해 강릉ㆍ포항ㆍ김해ㆍ제주 상공을 비행한 뒤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이 여행상품은 지난달 판매를 시작했는데 당일 매진됐다.

항공업계는 기착지 없는 항공 여행으로 코로나19로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겠다는 것이 이유다. 매출은 물론 최소한의 항공기 운항 횟수를 만들어야 시스템 정비 등도 진행할 수 있어서다. 여기에 항공사 소속 기장의 비행 라이선스 유지를 위해서란 분석도 있다. 여객기의 경우 기종마다 조종 면허가 다른데 일정 수준 이상 비행시간을 유지하지 못하면 면허를 잃을 수 있어서다. 때문에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세계 항공업계는 도착지 없는 비행 상품 도입에 속속 뛰어드는 추세다.

관광비행에 동행한 제주항공 김재천 부사장이 탑승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곽재민 기자

관광비행에 동행한 제주항공 김재천 부사장이 탑승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곽재민 기자

 김재천 제주항공 부사장은 “목적지 없는 비행 상품은 코로나 시대에 항공사가 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만들자는 취지”라며 “여행 자체가 목적인 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비행기라는 공간이 도시에서 도시로의 이동뿐만이 아니라 결혼식, 동창회와 같은 특별한 엔터테인먼트의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천=곽재민 기자 jmkwak@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