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달래는 신묘한 힘을 숲은 품고 있다. 울창한 숲에서 한나절 보내는 것보다 위로와 평온을 주는 일도 없을 테다.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 숲, 가을빛으로 물든 심심산곡의 암자라면 그 위력이 더 강하다. 강원도 오대산 국립공원. 가을이 깊어진 그 숲길을 걸으며 다시 한번 깨달은 사실이다.
강원도 오대산 가을 산행 #구도자들이 걷던 9㎞ 옛 숲길 #태풍 피해 컸지만 탐방객 줄이어 #부처 사리 모신 산사에도 가을빛
걷기 좋은 옛길
올가을 한반도의 단풍이 예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지난여름의 큰비와 늦더위로 인해, 얼룩덜룩 반만 색이 들었다가 잎이 말라버리는 경우가 허다해져 버렸다. 그래서 오대산 선재길을 찾았다. 올가을에는 확실한 단풍 명소로 가야 실패가 없다.
남녘의 양지바른 들에서부터 북벌하는 봄과 달리, 가을은 북녘의 산머리에서부터 내려온다. 강원도 안쪽으로 들수록 가을 기운이 완연하더니, 오대산은 이미 한가을이었다. 오대산은 전 국민이 다 아는 가을 단풍 명승이다. 가을마다 단풍 산행객이 줄을 잇는다. 지난여름 태풍 피해로 탐방로 일부(상원사~동피골, 3.6㎞)가 끊겨버렸는데도, 주말마다 1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들고 있다.
오대산의 너른 품 한복판에 천년 고찰 월정사와 말사인 상원사가 있는데, 두 사찰을 잇는 길이 선재길이다. 대략 9㎞ 길이의 숲길. 평탄한 흙길이지만, 3시간이 족히 걸린다. 매표소 어귀 월정사 일주문에서 시작해 전나무숲을 거쳐 선재길로 드는 게 보통이다. 1㎞ 길이의 전나무숲은 아름다운 숲길로, TV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워낙 유명한 장소. 40m 높이의 전나무 2000여 그루가 빼곡히 도열한 채 가을 손님을 맞고 있었다. 월정사 경내도 가을빛이 진했다. 사천왕문과 금강루 사이의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고 풍성했다.
김재부(48) 오대산국립공원 자연환경해설사가 “훤칠하고 이름난 나무는 없지만, 온갖 잡목이 뿌리내린 숲길이라 단풍 빛깔이 더 다양하고 화려하다”며 발길을 재촉했다.
본격적인 선재길은 월정사 부도밭 너머 ‘회사거리’서부터. ‘깨달음, 치유의 천년 옛길’이라 새긴 안내판이 선재길에 들었음을 알렸다. 선재길은 뿌리 깊은 옛길이다. 1960년대 말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에 도로가 나기 전부터 스님과 신도가 오가던 비밀스러운 숲길이다. 한동안 ‘천년 옛길’로 불리다, 국립공원공단과 월정사가 옛길을 복원하면서 2013년 ‘선재길’이란 정식 이름을 달았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에서 이름을 빌려왔단다.
선재길을 걸었다. 사박사박한 흙길, 평탄한 데크길이 대부분이라 단풍 구경하며 산책하듯 거닐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쉼터가 있었지만, 계곡의 너럭바위에 앉아 여유를 부리는 이들이 더 많았다.
오대천 상류 ‘보메기’는 일제 강점기 자원 수탈의 현장이다. 오대산에서 벌목한 나무를 이곳에서 띄워 한강으로 보냈단다. 그 너른 개울에도 가을에 내려와 있었다. 바람결에 짙푸른 하늘과 붉은 단풍이 시시각각 수면 위를 물들였다. 개울에 드리운 단풍에 넋을 놓고 잇는 순간, 눈 앞에서 수달 가족이 날랜 몸놀림으로 오대천을 휩쓸고 지나갔다. 수달도 단풍놀이에 동참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순례자의 길
선재길은 상원사에서 끝나지만, 또 다른 길이 꼬리를 문다. 오대산 정상으로 통하는 비로봉 코스는 산악인보다 불자가 더 많이 오르는 길이다. 상원사의 산내암자인 적멸보궁(보물 제1995호)이 있어서다. 오대산은 이른바 불교 5대 성지로 통한다. 신라의 승려 자장(590~658)이 중국 오대산에서 진신사리(석가모니의 사리)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 비로봉 중턱에 모셨다고 전해지는데, 그곳이 바로 적멸보궁이다. 『삼국유사』에도 그 기록이 남아있다. 선재길이 단풍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전부터 불자들이 그 길을 밟고, 도로를 내 산을 거슬러 올랐던 이유다. ‘적멸’은 불교 용어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경지를 뜻한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1189m)까지는 대략 1.7㎞의 비탈길. 돌계단과 돌상이 늘어서 있어 헤맬 걱정은 없었다. 단풍은 이미 등산로 초입부터 그윽했다. 30분쯤 걸었을까. 적멸보궁의 수호암자인 중대 사자암에 닿았다. 험준한 비로봉 비탈에 절집 다섯 채가 계단식으로 틀어 앉아 속세를 굽어보고 있었다. 가히 울긋불긋한 단풍 숲 위로 암자가 두둥실 떠 있는 형국이었다.
예서 적멸보궁까지는 10분이 더 걸렸다. 탐방객이 늘어선 선재길과 달리 부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인적도 없이 적막했다. 아직 하산하지 못한 단풍만이 중생을 반겼다. 적멸보궁은 차림이 소박했다. 작은 불당과 사리탑이 전부. 진신사리를 모신 공간이어서 불상조차 들이지 않았단다. 갖가지 소망을 붙인 연등만이 불당에 매달려 요란히 흔들렸다.
“스님, 세상이 이러니 마음이 어수선해 왔습니다” 적멸보궁에서 마주친 스님은 너그러운 미소로 합장할 뿐 말이 없었다.
적멸보궁과 중대 사자암에서 바라본 오대산은 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그저 깊고도 고요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온화한 가을빛을 내고 있었다.
오대산=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gn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