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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도 없는 9명이 죽었다…택배 노동자 악몽의 분류작업

중앙일보

입력

택배 산업 종사자 사망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자 과중한 업무 부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여파로 택배 물동량이 급증한 가운데서다.

택배 터미널 모습. [중앙포토]

택배 터미널 모습. [중앙포토]

‘쿠팡 발(發) 코로나 19 피해자 지원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2일 오전 6시쯤 경북 칠곡에 있는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 20대 A씨가 집에서 숨졌다. A씨는 지병이 없었다. 술ㆍ담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책위는 “일용직 A씨는 남들과 같이 하루 8시간, 주 5일을 꼬박 근무했다. 물량 많은 날에는 30분에서 1시간 30분씩 연장 근무를 했다”며 과로사 가능성을 제기했다.

같은 날 한진택배 한 대리점에서 일하는 30대 택배기사 김모씨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8일에도 서울에서 CJ대한통운 40대 택배기사가 호흡 곤란을 호소하다 숨졌다. 올해 들어서만 택배 기사 8명이 과로사로 세상을 떠났다.

‘공짜 노동’ 분류 작업 과로사 원인? 

‘공짜 노동’으로 불리는 분류 작업이 택배기사 과로사의 한 원인이란 지적이 나온다. 택배 노조 측은 코로나 19로 택배 물량이 급증하자 사실상 무임금 노동인 분류 작업에 대한 인력 충원을 택배업체 측에 요구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류 작업이란 택배 상자를 세부 지역별로 구분해 차량에 싣는 업무다. 하루 평균 8~9시간이 들어간다. 전체 근무시간 중 40% 이상을 차지한다. 배송 업무까지 포함하면 택배기사 일평균 노동 시간은 13시간을 뛰어넘는다.

반면 택배업체는 택배기사가 받는 배송 수수료에 분류 작업 비용이 포함돼 있다며 추가 비용, 인력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행법상 택배기사는 ‘개인사업자’로 분류한다. 월급이 아닌, 건당 수수료를 받고 있어서다. 한 택배업체 관계자는 “국내 택배 서비스 도입 초기부터 분류 작업은 택배기사가 담당했다. '분류 작업도 택배 근로에 포함돼 있다'는 2010년 대법원 판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산재 적용도 어려워  

택배기사는 산재보험 적용도 받기 어렵다. 택배기사를 비롯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직) 14개 업종은 산재보험 적용 대상이다. 하지만 본인이 적용 제외를 신청할 경우 가입하지 않을 수 있다. 언제든 계약 해지당할 수 있는 택배기사 입장에선 사용자 측이 산재보험 적용 제외를 요구할 경우 거부할 방법이 없다. 택배 노조 측은 이런 부분을 택배 업체가 악용할 여지가 많다고 주장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15일 고(故) 김원종씨 산재보험 제외 신청 대필 의혹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15일 고(故) 김원종씨 산재보험 제외 신청 대필 의혹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지난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근거로 택배 배송 중 사망한 CJ대한통운 택배 노동자 고(故) 김원종씨의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서가 대필로 쓰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양 의원은 “김씨 신청서에 적은 필체와 다른 사람 신청서 필체가 같아 사실상 한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며 ”해당 건을 포함해 3명이 각 2장씩 총 6장의 필체가 상당 부분 유사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특수고용노동자를 위한 별도 보호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주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택배기사 분류 작업은 예전부터 논란거리였다. 기술 발전으로 노동 환경이 나아지는 듯하다가 코로나 19란 악재가 덮쳤다”며 “택배 관련 별도법을 만들어 연속 노동시간을 제한하거나 근로기준법에 버금가는 특수고용형태 근로 종사자 관련 보호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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