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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환 曰] 동독 민심 산 게 독일통일 비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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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호 30면

한경환 총괄 에디터

한경환 총괄 에디터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지 1년이 채 못 된 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이 완성됐다. 당시 독일 못지않게 흥분한 나라는 한국이다. 통일이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엔 여전히 극심한 냉전이 이어지고 있다. 통일에 대한 환상과 열정도 예전만 못하다.

북한 정권의 반인권적 행위 비판하고 #북한 주민의 인권과 자유 수호 도와야

올해 들어서는 남북한 간의 긴장이 더욱 고조돼 왔다. 지난 5월 3일엔 북한군이 남측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한국군도 응사했다. 한 달 뒤인 6월 16일 북한은 남북연락사무소 청사를 무참하게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9월 22일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소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을 북한군이 총격으로 사살하고 시신마저 태우는 엽기적 사태가 벌어졌다. 북한은 노동당 창건 75주년인 지난 10일엔 심야 열병식에서 신형 대륙간탄도탄(ICBM)·방사포·전차 등 공격용 전략 무기를 대거 공개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한국 정부와 여당의 대응은 기가 찰 노릇이다. 군·정보 당국은 우리 국민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막기는커녕 월북 의사가 있는 것 같다는 이유로 공무원의 죽음을 방치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뒤늦게 사과의 뜻을 전하자 제대로 된 항의조차 못 하고 대신 ‘사과는 이례적’이라고 반기는 납득하기 어려운 반응을 보였다. 북한이 신형 대량살상용(WMD) 전략 무기를 개발했는데도 “남북이 손잡을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한다”며 오히려 북한이 집착하는 종전 선언 띄우기에 나서기도 했다.

통일 전 독일에서도 긴장은 늘 있었다. 1953년 6월 17일 동독 베를린 주민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소련군의 무력 진압, 61년 8월 13일 베를린장벽 구축, 74년 4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최측근인 개인 비서 귄터 기욤의 동독 스파이 발각 등은 동서독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위기 때마다 서독 정부의 대응은 좌든 우든 한결같았다. 『비밀과 역설』(이동기 지음, 아카넷)에 따르면 좌우 할 것 없이 서독 정부는 화해와 협력 시기에도 동독 공산정권의 정치억압과 인권유린, 기본권 부정적 행위에 대해서는 원칙적·선언적·규범적으로 단호하게 비판했다. 서독 정부는 항상 인권, 기본권, 시민권 등의 개념을 명료히 사용했다.

정책의 일관성도 돋보인다. 중도좌파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가 69년 표방했던 동방정책에 중도우파 기민·기사당은 처음엔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는 82년 집권하면서 사민당의 브란트와 헬무트 슈미트 총리 정부의 동방정책을 계승했으며 오히려 이를 더욱 발전시켜 결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사사건건 김정은 눈치 보기에만 급급한 인상을 주는 우리 정부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러니 북한이 더욱 거만하게 나오는 게 아닌가.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차후에도 군사분계선이나 NLL을 실수로, 혹은 월북 의사를 가지고 넘어가는 우리 국민을 북한군이 이번처럼 쏴도 또 방치할 것인가.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남한의 민심은 늘 두 쪽 나 있다. 국민 전체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어느 한쪽만 보는 북방정책은 기만이다. 그래선 독일의 동방정책 같은 지속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가 여전히 독재의 탄압하에 놓인 북한 주민들에게 어떻게 비치겠는가.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동독 주민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더라면 베를린장벽 붕괴 후 변혁기에 ‘우리는 한 민족’ ‘통일을 원한다’는 지지를 얻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눈앞의 정권의 이익만 생각해서는 통일의 길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한경환 총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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