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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총독 자오얼쉰, 마적 장쭤린을 정부군에 편입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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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7〉

러·일전쟁 발발 전인 1903년 가을, 요동반도의 끝자락 뤼순(旅順)을 방문한 자오얼쉰(앞줄 오른쪽 둘째). 자오얼쉰 왼쪽은 동생 자오얼펑. [사진 김명호]

러·일전쟁 발발 전인 1903년 가을, 요동반도의 끝자락 뤼순(旅順)을 방문한 자오얼쉰(앞줄 오른쪽 둘째). 자오얼쉰 왼쪽은 동생 자오얼펑. [사진 김명호]

청(淸)제국 멸망 17년 후인 1927년 9월 3일, 83세의 노인이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국의 언론매체가 마지막 만주(당시는 동3성) 총독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의 사망을 연일 대문짝만 하게 다뤘다.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군사정변과 중국 공산당의 첫 번째 무장폭동으로 온 중국에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할 때였다.

일본 위력에 놀란 서태후가 파견 #인재 발굴·양성 기반 구축에 역점 #공직자에게 진보·효율·절약 강조 #표준서 어긋나면 가차없이 처벌 #새 화폐 만들고 자본가·지주 단속 #치안문제 해결 위해 마적단 회유

선양(瀋陽)에 20여 년간 거주했던 영국 선교사가 훗날 구술을 남겼다. “자오얼쉰은 의지가 강하고 겸허했다.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정치적 안목도 뛰어났다.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했다. 총독은 개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여러 번 만났어도 딱 한 번, 개혁은 2년 안에 끝내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말 외에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오의 개혁은 사람 발굴과 인재 양성의 기반 구축이었다. 사망 소식이 퍼지자 6만여 명이 거리를 메운 선양의 반일시위도 이틀간 중지됐다. 나도 신만주 건설의 초석을 놓은 총독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자오얼쉰은 공직자들에게 진보, 효율, 절약을 강조했다. 표준에서 어긋나면 가차 없이 처벌했다. 연로하고, 외국 유학도 거치지 않고, 외국어도 할 줄 모르는, 유교(儒敎)의 세례를 받은 총독이었다. 혁명파들의 조정 전복 활동을 엄하게 다뤘지만, 완고하지 않았다. 중국에 필요한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만주의 개혁도 조용하게 점진적으로 추진했다. 재정이 확보되자 학교부터 세우고 해외 유학을 장려했다. 2년간 2700명 이상의 준재들을 독일, 영국, 일본, 미국에 보낸 공은 말살될 수 없다. 마적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을 정부군에 편입시킨 모험도 자오얼쉰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말년에 이런 구술을 남겼다. “아버지는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자오얼쉰만은 예외였다. 말만 나와도 긴장했다. 인사 갈 때 따라간 적이 있었다. 작고 조용해 보이는 노인 앞에서 어찌나 진땀 흘리며 눈치 보는지 웃겨 죽는 줄 알았다.”

반일시위 중단하고 자오얼쉰 애도

마적에서 출발해 북양정부의 마지막 국가원수까지 역임한 동북왕 장쭤린(오른쪽). 1928년 1월, 톈진(天津). [사진 김명호]

마적에서 출발해 북양정부의 마지막 국가원수까지 역임한 동북왕 장쭤린(오른쪽). 1928년 1월, 톈진(天津). [사진 김명호]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청(淸)제국의 실권자 서태후는 일본의 군사력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실감했다. 교전국은 아니었지만, 10년 전 일본에 패했을 때보다 충격이 더 컸다. 주전장이 제국의 발상지 만주, 특히 요동반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만주는 농업생산력이 높지 않았다. 요동반도는 예외였다. 기후, 토양, 지형 등 지리적 조건이 다른 곳에 비해 월등했다.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 러·일전쟁을 계기로 철저히 파괴됐다. 세수(稅收)가 줄어들고 약탈이 빈발했다.

서태후는 만주에 파견할 사람을 물색했다. 산시(山西), 후난(湖南) 두 성(省)의 신정(新政)을 성공적으로 이끈 호부상서자오얼쉰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만주총독 격인 성경장군(盛京將軍)에 봉했다. “만주(동3성)는 황실의 발원지다. 네 모친처럼 교육에 힘써라. 교육만 제대로 하면 다른 난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서태후는 자오의 집안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3형제 대과 급제시킨 뒤 음독한 홀어머니

장쭤린이 만든 동북 공병창.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사진 김명호]

장쭤린이 만든 동북 공병창.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사진 김명호]

자오얼쉰의 집안은 6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6명의 대과 급제자(進士)를 배출한 산둥(山東)의 명문이었다. 주목은 조부 때부터 받았다.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진사였고 아버지도 진사였다. 아버지는 운이 없었다. 비적 토벌 나갔다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순절(殉節)했다고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잠시였다. 가세가 기울자 종이 살 돈도 없었다. 아들 4명을 모친이 직접 교육했다. 3명이 대과에 급제하자 “이제야 지하에 있는 남편 볼 면목이 있다. 만나서 큰소리 치러 가겠다”는 유서 남기고 음독했다.

자녀들은 모친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슬프다고 곡(哭)해야 하는 건지 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1000년간 면면히 이어온 과거에서 진사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당대의 진사 3명이 머리를 짜내도 비석에 뭐라고 써야 할지조차 결론을 못 냈다. 이럴 땐 과거엔 낙방했어도 장남이 제일이었다. “기이한 엄마의 땅”이라며 기모지(奇母地) 석 자를 일필휘지하자 동생들도 무릎을 쳤다. 지금도 산둥성 타이안(泰安)에 가면, 침착하고 억셌지만 차남 얼쉰과 3남 얼펑(爾豊·이풍)이 총독 되는 건 보지도 못하고 남편 만나러 간 성격 급한 부인의 묘를 만날 수 있다.

만주는 중앙의 통제가 느슨했다. 상인들은 중앙은행 화폐보다 루블화나 엔화를 선호했다. 성경장군 자오얼쉰은 새로운 화폐를 선보였다. 상인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자오는 자본가와 지주 180여 명을 잡아들였다. 17명의 목이 땅에 떨어지자 효과가 있었다. 상인들이 외국 돈 들고 은행으로 몰려왔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신식학교도 닥치는 대로 세웠다. 엉터리 교사들은 농사나 지으라고 교단에서 끌어내렸다. 치안이 문제였다. 치안대는 도둑놈 소굴보다 더했다. 마적 두목 장쭤린을 회유하기로 작심했다.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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