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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가 홍남기를 쫓아냈다···'전세 난민' 만든 오만한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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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 전셋집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좌). 이 사진에 한 네티즌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얼굴을 합성했다(우).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 전셋집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좌). 이 사진에 한 네티즌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얼굴을 합성했다(우).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지난 13일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진 하나가 올라왔다. 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 문 앞에 전셋집을 보려는 사람 10여명이 길게 줄을 선 장면이었다.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가 시행되면서  전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됐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집의 전세 계약자는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현 세입자 이사 날짜에 무조건 맞추는 조건도 붙었다.

[현장에서]부동산대책 부메랑 맞은 홍남기

사진이 화제가 된 후 누군가가 사진 속 줄을 선 사람에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얼굴을 합성해 올렸다. 홍 부총리가 서울 마포 전셋집에서 최근 퇴거 요청을 받았고, 아직 새 전셋집을 구하지 못한 사실을 비꼰 것이다. 합성 사진이 돈 후 또다시 ‘웃픈’ 일이 발생했다. 세입자이면서 집주인인 홍 부총리 소유의 경기 의왕시 집 매매가 불발될 위기다.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정책 발목잡힌 홍남기 부총리.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부동산 정책 발목잡힌 홍남기 부총리.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개인으로는 누구 하나 잘못 한 사람은 없다. 의왕 집과 세종 분양권으로 ‘2주택자’인 홍 부총리는 집을 팔아 공적 책임을 다하려 했다. 세종 분양권을 팔면 되지만, 전매 제한에 걸려 팔 수가 없다. 의왕 집 세입자는 나가려고 했지만, 새 전셋집을 구할 수가 없어 계약갱신청구권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전입이 어려워진 의왕 집 매수자는 대출을 받지 못해 잔금을 치르기 어렵다.

정부는 부동산 정책의 선한 의도를 강조한다. ‘나쁜’ 투기꾼을 잡아 ‘착한’ 실거주자를 돕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정책이라도 그 결과가 반대로 삶의 장애가 된다면 누구도 손뼉 쳐 줄 수 없다. 부동산을 선·악의 문제로 본 데 따른 부메랑이자, 정책의 역설이다. 홍 부총리 사례는 ‘사지도, 팔지도, 보유하지도, 전세를 살지도 못한다’는 아우성의 종합판쯤 된다.

문재인 정부가 23번 부동산 정책을 낼 때마다 항상 이런 식의 부작용이 있었다. 그때마다 정부는 정책의 허점을 들여다보거나 수정하지 않았다. 다주택자를 투기꾼으로 규정하고, 이들 때문에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핑계도 댔다. 정책 부작용을 언론이 만든 허상쯤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오히려 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며 전 국민의 주거와 희망을 옭아맸다. 홍 부총리는 12일에도 기재부 간부회의에서 “필요하면 전·월세 시장에 대한 추가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구멍 메우기식 정책은 또 다른 구멍을 만들 뿐이다. 특정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보편적 규제를 하는 나라도 없다. 강남 집값을 잡겠다며 전체 주택담보대출을 옭아맨 건이 대표적이다. ‘희망에 대한 규제’에 놀란 30대는 패닉 바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임대차보호법은 전셋값을 밀어 올렸을 뿐 아니라 전세 절벽을 만들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전세 거래는 지난 7월 1만1480건에서 9월 4518건으로 절반 넘게 줄었다. 그런데도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국회에서 “임차인이 살 수 있는 기간이 4년으로 늘어나는 것을 전제로 (시장 흐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착한’ 목표를 위해선 현실의 고통쯤은 무시되어도 된다는 말로 들렸다.

안타깝지만, 홍 부총리가 전세 난민이 된 현실이 오히려 다행스럽다. 내 신념만 맞다는 오만함에 대한 자문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정책의 역설이 빚은 부작용을 ‘내 문제’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가져 본다. 14일 열린 8차 부동산시장 점검 관계 장관회의에서 홍 부총리는 “신규로 전셋집을 구하는 분들의 어려움을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 말이 개인 홍남기로서는 물론 부총리로서 우러나온 진심이길 바란다. 원래부터 정책이란 나쁜 놈을 얼마나 세게 때려잡느냐가 아니라, 실타래처럼 꼬인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아니었던가.

세종=김남준 기자 kim.nam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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