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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반도체백혈병 기금 500억, 건물 사는데 다 쓰는 공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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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018년 4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민주노총 4.28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결의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고(故) 황유미 씨의 사진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4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민주노총 4.28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결의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고(故) 황유미 씨의 사진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사장 박두용)이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 사건’ 이후 삼성전자가 피해자 단체(반올림)와 협의해 기탁한 보건안전기금 500억원 중 390억원을 공단 건물을 매입하는 데 쓰기로 했다. 해당 건물에 산업재해 예방, 질병 실험 등을 하는 ‘미래전문기술원 청사’를 조성한다는 것인데, 야당에선 “피해자의 희생으로 마련된 기금의 무려 80%를 공단 자산과 몸집을 불리는 건물 매입에 지출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삼성서 반도체 피해보상 차원 기탁 #건물 390억, 부동산 용역비만 3억대 #공단 울산 있는데 굳이 판교 등 물색 #“재해 방지에 쓸 돈으로 몸집 불리나”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공단 측에서 받은 ‘삼성전자 발전기금 사용계획’에 따르면 공단은 기금 500억원의 사용처로 건물 구입 390억원, 연구 장비 및 각종 부대시설 구입 60억원, 제세공과금과 기타 비용 52억원을 책정했다. 또 건물 선정을 위해 부동산 업체와 3억 4000만원에 컨설팅 계약도 맺었다.

공단 측은 건물 후보 지역에 대해 “분당, 판교, 광교 등 수도권 지역을 우선 물색 중이고, 적절한 건물이 없을 시 서울권역으로 확대해서 추진할 계획”이라고 의원실에 답변했다. 수도권 건물을 매입하는 이유에 대해선 “전자산업 업종이 많이 분포해 있고, 주변 환경 등도 고려했다”고 했다. 임 의원실 측은 “취득세 등 각종 세금을 고려하면 400억원 이상이 온전히 건물 비용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 건물에 안전보건 종합상황실과 화학물질 분석실, 위험물질 모니터링 시스템 등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게 공단의 계획이다. 임 의원실에 제출된 자료를 보면 공단은 지난 6월 기본 계획 수립 뒤 후보 건물 24곳을 검토했고, 7월에는 부동산 업체와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또 이달 내로 청사선정위원회를 열어 구입할 건물을 최종 선정하고, 다음 달 리모델링 등 개원 준비를 할 계획인 것으로 파악됐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 오종택 기자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 오종택 기자

쟁점은 ‘390억 건물’이 과연 적절하냐는 것이다. 임 의원은 이날 “재해 방지를 위한 체계적 연구와 프로그램 등을 위해 쓰이는 돈은 정작 많지 않고, 대부분이 건물 구입에 투입되는 것”이라며 “좋은 취지로 기탁된 기금이 공단의 수도권 청사 설치 등 몸집 불리기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임 의원은 “정부의 균형발전 지침에 따라 공단 본부도 울산에 있고 지역에 청사를 설치하는 게 더 저렴한데, 굳이 판교 등 땅값이 비싼 지역만 물색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며 “사실상 500억원의 대부분을 청사 등 하드웨어에만 써버리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가 예산이 아닌 외부 공익 기금을 부동산 매입에만 대부분 할당한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공단 관계자는 이날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각종 인프라 설치에 적합한 건물과 관련 업체 접근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기금 계획을 수립했다”며 “건물비가 과도하다는 시각이 있을 순 있지만, 미래까지 고려한 시설 구축을 위해서는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이어 “향후 삼성 기금 외에도 공단 예산을 해당 시설 운영에 적절히 투입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측은 “기금 사용은 공단의 의사 결정 사안으로 삼성전자가 별도 입장을 밝힐 것은 없다”고 했다. 2018년 삼성전자와 반올림 협상 당시 조정위원장을 맡았던 김지형 전 대법관(변호사)은 “기금 운용은 협상 뒤 공단에 일임됐기 때문에 건물 구매 등 구체적인 사용처는 알지 못했다”고 했다.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왼쪽) 협상 모습. [중앙포토]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왼쪽) 협상 모습. [중앙포토]

김기남 당시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오른쪽)과 황상기 반올림 대표(왼쪽)가 2018년 11월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 및 이행계획 발표를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기남 당시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오른쪽)과 황상기 반올림 대표(왼쪽)가 2018년 11월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 및 이행계획 발표를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태는 200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자가 급성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시작됐다. 반도체, LCD 제조 공정에서 일한 피해자가 추가로 발생했고,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사건 11년 만인 2018년 11월 협상을 타결했다. 삼성전자가 공식 사과와 함께 개별 보상금을 지급하고, 별도로 산업안전 인프라 구축 등에 쓰일 보건안전기금 500억원을 공공기관에 출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기탁 기관으로 결정됐고, 삼성전자는 2019년 500억원을 공단에 기탁했다.

1987년에 설립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산업재해 예방과 각종 안전 시설을 관리 감독하는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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