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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할 때면 꺼내드는 중국식 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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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성훈 기자 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박성훈 베이징특파원

박성훈 베이징특파원

지난해 8월 홍콩 시위를 취재하러 간 건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중국 선전만 스타디움 앞에 집결한 수십 대의 군용 차량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선전시에 중국 무장 병력이 집결해 있는 모습은 중국군이 홍콩 시위 진압에 투입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정부가 칼을 빼 든다면 홍콩에 제2의 천안문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반중 정서에 기름을 부었다.

이 사진이 나오게 된 경위는 최근에 밝혀졌다. 중국 국가안보국이 지난 11일 대만 독립 관련 중국 본토에서 첩보 활동을 해온 인사 수백 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하면서다. 안보국은 대만의 유엔 가입을 추진해 온 대만 연합 간부 리멍주(李孟居)가 사업을 빌미로 들어가 스타디움 인근 호텔 최상층에서 인민해방군(PLA) 훈련 장면을 촬영했다고 밝혔다. 독립 분위기가 가열되는 대만을 압박하기 위해 공개된 정보다. 1년 2개월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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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일은 지난해 11월 홍콩 주재 영국 총영사관 직원이었던 사이먼 청(28)의 체포 과정에서도 벌어졌다. 그는 선전시에 출장을 갔다가 실종됐다고 신고됐는데 알고 보니 공안당국에 붙잡혔다. 중국 공안은 2주 뒤 그를 불법 안마 시술소에 3차례 출입한 혐의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그가 업소에 들어가는 CCTV 영상도 공개됐다. 그러나 사이먼 청은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홍콩 시위 연루 혐의에 대해 집중 추궁을 당했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가 홍콩 시위를 배후 조종하고 있다고 본 중국 정부가 연루자를 찾아내기 위해 각종 정보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시진핑 주석을 ‘광대’라고 비판하는 글을 쓴 뒤 실종됐던 중국 부동산 재벌 런즈창 회장은 지난달 베이징 제2중급인민법원에서 징역 18년형을 선고받았다. 4974만 위안(85억원)을 횡령하고 이중 3640만 위안(61억원)을 아들에게 고문료로 부당 지급한 혐의를 받았다. 쉬장룬 전 칭화대 교수 역시 성매매 혐의로 체포됐다가 풀려나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는 시진핑 주석의 3선 연임과 코로나19 대처 부실을 비판했다.

중국 정부는 법치를 강조한다. 국가 안보 위협과 부정부패 사범은 1순위 처벌 대상이다. 공정한 법 집행은 사회 질서의 근간이지만 특정 혐의를 필요한 시점에 꺼내 들어 적용한다는 의심은 합리적 수준을 넘어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의 압박이, 중국의 독주가 심해질수록 이런 상황은 악화되는 분위기다. 베이징 거리에 무수히 달린 CCTV를 보며 언제 무슨 일로든 체포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박성훈 베이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