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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북한 변한 게 없다…냉철히 대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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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례적으로 한밤중에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을 열고 ‘눈물 연설’을 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극존칭을 써 가며 ‘미안하다’ ‘고맙다’는 표현을 10여 번이나 했다. 대한민국을 향해서도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라며 “하루빨리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남북 간에 손 맞잡는 날을 기원한다”고 했다. ‘핵보유국’ 대신 ‘전쟁 억제력’이라고 표현하는 등 군사 메시지도 순화시켜 발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례적 유화 메시지 직후 특대형 ICBM 과시 #김정은 본심 직시, 피살 규명·제재 지속해야

정부는 김정은의 연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청와대는 11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긴급회의에서 김정은의 ‘남북 손 맞잡는 날’ 언급에 대해 “주목한다”는 입장을 냈다. YTN과 연합뉴스TV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열병식 전 과정을 통째로 중계한 것도 여권의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설 도중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친 김정은의 얼굴은 이어진 열병식에서 서방 언론이 ‘괴물’이라 묘사한 특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등장하자 기쁜 표정으로 바뀌었다. 세계 최장인 11축 22륜 발사 차량(TEL)에 얹힌 이 미사일은 2~3개 핵탄두를 한꺼번에 장착하고 미국 본토까지 날아가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입으론 유화 공세를 펴면서 손으론 한·미의 뒤통수를 친 것이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우리 국방부조차 북한의 이런 위험한 위력 과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고 했겠는가.

이날 열병식은 김정은의 ‘눈물 연설’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근본적으로 바뀐 건 없음을 확인시켰다. 공무원 피격사건을 무마하고 더 이상의 관계 악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유화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미 본토까지 날아가는 핵 공격 능력을 과시해 한·미 동맹의 균열과 남남 갈등을 부추기고 내부 결속을 다지겠다는 속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3년 내내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강변해 왔지만 실은 북한은 한시도 쉬지 않고 핵·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해 왔음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정부는 김정은의 ‘눈물’ 대신 본심을 직시하고 냉철하게 대응해야 한다. “북한 지도자가 두 번이나 유감을 표명했으면 된 것 아니냐”며 섣불리 종전선언을 밀어붙인다면 비수를 감춘 김정은의 유화 공세에 먹잇감이 될 뿐이다. 지금 문 대통령이 할 일은 현실성 없는 종전선언 추진이 아니라 북한에 공무원 피살 책임을 엄중히 묻고 한·미를 위협하는 ‘핵 무력 과시 쇼’의 중단을 촉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김정은의 연설에서 우리는 대북제재의 효과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정은이 울면서 ‘미안하다’고 연설한 건 북한 내부가 그만큼 힘든 상황임을 보여 준다. 그런 만큼 제재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북한을 설득해 비핵화에 나서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