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선데이 칼럼] 나훈아가 노래를 안하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06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누구는 “그동안 트로트를 무시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개념이 있었다”고 했고, 누구는 혀를 차며 “영감이 난닝구 입고 애쓴다”고 했다. 추석 연휴를 달궜던 나훈아 공연을 보고 난 소감이다. 앞엣것은 우파 대학교수의 촌평이었고, 뒤엣것은 좌파 출판인의 감상이었다.

국민 위해 죽은 대통령 없다 #나훈아 말에 여야 아전인수 #역사의 간신 되지 않으려면 #제 할 일 해야 한다는 본뜻

누구나 자신의 노래 취향이 있고 가수에 대한 호불호도 있지만, 이 같은 관전평은 꼭 그런 것만으로 갈라진 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보다는 시대를 잃고 떠도는 이데올로기가 오지랖 넓게 끼어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각자 자기 진영의 담장 뒤에서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본 결과다. (이밖에 페미니즘적 시각차도 있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논외로 하기로 한다.)

처음부터 갈라지진 않았을 터다. 그런데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할 즈음 “KBS는 앞으로 거듭날 것”이란 나훈아의 말이 두 시청자의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그러더니 공연이 끝나갈 무렵 나온 “국민 위해 목숨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은 결정적인 필터가 됐다. 두 사람이 극단적 성향도 아니고, 지극히 합리적인 이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인데도 자기들만의 색깔이 입혀졌다.

나훈아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은 지금의 KBS가 국민을 위한 방송으로는 모자란다는 데 방점을 찍었고, 다른 사람은 멍석을 깔아준 방송사에 대한 무례로 들었다. 한 사람은 북한군에 의해 사살되고 시신이 소각된 국민을 떠올리며 공감했고, 다른 사람은 월북자를 두둔하며 남북 평화를 저해하는 발언이라 분노했다.

이들이 이 정돈데 노상 나뉘어 싸우는 정치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장 야권에서는 나훈아 말을 정부 비판으로 해석하며 “오죽 답답했으면 저런 말을 하겠냐”고 비아냥거렸다. 여권은 또 이를 “정쟁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아전인수”라고 발끈했다.

역시 나훈아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그건 생각 안 하고 좌우가, 여야가 서로 제 밭으로 물을 끌어가려고만 애쓰고 있는 것이다. 나훈아가 공연을 마친 뒤 KBS 제작본부장과 나눈 대화에 힌트가 있다. 그는 “어떤 가수로 남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선데이칼럼 10/10

선데이칼럼 10/10

“우리는 유행가 가수다. ‘잡초’를 부른 가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부른 가수,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 뭐로 남는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얘기다. 그런 거 묻지 마소.”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다. 가수는 가수로 남고, 그가 부른 노래로 남는 거지 또 뭐로 남겠느냐는 거였다. 거의 공자급이다. 공자 말씀이 다른 게 아니잖나.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느냐”는 제경공의 질문에 공자는 답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 거다. 제 할 일은 안 하면서 남 탓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 사회가 갈등하며 엇나가고 있는 거란 말이다.

대학 가고 군대 가서 제 할 일 안 하고 틈만 나면 엄마 아빠 찬스만 기대하는 자식들이 있고, 제 자식을 위해 온갖 불법·편법 다 저지르면서 입으로는 개혁을 외치는 부모 장관들이 있다. 그런 불법·편법 찾아내 응징하는 게 제 일인데도 오히려 허물 덮고 사건 마무리하는 데만 혈안인 검찰이 있고, 국민의 대표로서 권력을 감시할 의무를 저버리고 오히려 권력의 대변인을 자임해 궤변을 늘어놓는 국회의원들이 있다.

그 자리에만 가면 필수코스로 배우는 건지 유체이탈 화법으로 국민을 위로하긴커녕 오히려 속을 뒤집는 대통령이 있고, 그 자리에 가려면 선행학습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영혼 없는 화법을 따라 하는 여당 대표가 있다.

권력을 비판하느라 여권에 화살이 쏠리지만 야당도 나을 게 하나도 없다. 어쩌다 정권을 잃고 국민의 눈에서 벗어나게 된 줄 뻔히 알면서도 몹쓸 과거와 결별할 줄 모른다. 제 살 도려내는 아픔을 감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고, 상대 실수라는 사과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하긴 제 할 일, 제 의무만 좀 잊으면 온갖 특권을 누리는 건 여당 못지않으니 아쉬울 게 없다. 그러니 국민의 마음을 돌리기는 요원하기만 하다.

나훈아는 이런 사람들이 득실대고 득세하는 우리 사회에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경종을 울린 것이다. 콘서트 제목이 ‘대한민국 어게인’인 까닭이다. 가수가 노래 대신 예능에 몰두하면 가수 대신 방송인으로 불린다. 부모 찬스 자식, 불법 행위 장관, 권력 하수 검찰, 권력 대변 국회의원, 유체 이탈 대통령, 특권 향유 야당 의원… 나중에 이렇게 불리게 될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역사는 이들을 뭉뚱그려 간신이라고 기록한다. (부모 찬스 자식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훈아 말에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여야 좌우 모두 제 할 일을 하면 된다. 공자 말씀이 좀 어렵다면 괴테가 좀 더 쉽게 말한다.

“각자가 자기 집 앞을 쓸어라. 그러면 온 세상이 청결해진다. 각자가 자기 할 일을 다 하면 사회가 할 일이 없어진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