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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 칼럼니스트의 눈

트럼프 현상은 선거 이후에도 계속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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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020년 미국 대선

트럼프 대통령(공화)과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선 후보가 맞붙은 첫 토론이 지난달 29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에서 열렸다. 3일 후인 10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공화)과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선 후보가 맞붙은 첫 토론이 지난달 29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에서 열렸다. 3일 후인 10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AFP=연합뉴스]

100년 전 이 무렵인 1919년 10월 2일.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백악관 욕실 바닥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의식은 없었고 몸 좌측이 마비되었으며,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뇌졸중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윌슨 대통령을 발견한 이는 부인 에디스였다. 에디스와 대통령 측근들은 대통령의 발병을 비밀에 부쳤다.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1921년 초 그가 퇴임하고 나서야 대통령이 1년 이상 실질적으로 식물 대통령이었음을 알게 되었다.(『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윌슨 대통령이 호기롭게 제창했던 민족 자결주의와 평화주의의 이상을 담은 그 유명한 윌슨 14개 조항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선거 도중 코로나에 감염된 트럼프 #전문성 외면한 반 지성주의 때문 #최악의 인종 갈등, 분노의 포퓰리즘 #선거 끝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2020년 10월 2일. 미국의 현직 대통령은 자신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19에 감염되었음을 트위터로 알렸다. 비밀이 없는 트위터 시대의 트위터 대통령답게! 한밤중의 트위터 메시지는 그러잖아도 미국 선거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서울·북경·평양·베를린 등 세계 곳곳은 충격·혼란·추측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74세의 트럼프 대통령은 얼마나 빨리 회복할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보다 세 살 위인 77세의 민주당 바이든 후보는 괜찮을까? 연방 공직선거법에 따라서 11월 3일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는 과연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인가?

필자가 굳이 예측을 해야 한다면, 미국 대통령 선거는 11월 3일 예정대로 치러지리라고 본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은 코로나 감염 이전보다 훨씬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예측보다 설명이 정치학자의 역할이라고 믿는 필자가, 좀 더 깊이 생각해보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감염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코로나바이러스는 한 사회의 강점과 약점을 무자비하게 파헤친다. 트럼프 대통령의 감염은 미국의 예방의학, 의료 수준이 부실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식, 전문성, 전문가의 목소리를 외면해왔던 트럼프식 반(反)지성주의, 즉 트럼프 현상의 한 특징이 대통령 감염의 원인이다.

코로나는 미국 사회분열의 바이러스

코로나가 드러내는 또 다른 미국 사회의 민낯은 분열이다. 갤럽은 최근 미국 유권자들에게 ‘정부가 제공하는 무료 백신을 오늘 맞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물었다. 레드 아메리카(공화당 상징색이 붉은색)와 블루 아메리카(민주당의 상징색은 파란색)의 분열은 여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민주당 지지자의 압도적 다수인 81%가 백신 접종에 응하겠다고 대답한 반면에, 공화당 지지자의 47%만이 백신 접종에 응하겠다고 대답하고 있다. 코로나가 쉽사리 통제되지 않는 위협적인 바이러스라고 믿고 개인 방역에 충실한 미국이 있는 반면, 코로나 위협은 과장되었다고 믿는 미국이 있다. 한마디로 코로나는 미국 사회의 분열을 증폭하는 바이러스다.

결국 필자의 질문은 이렇게 정리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증폭시켜 드러내고 있는 미국의 분열, 미국의 반(反)지성주의, 다시 말해 트럼프 현상은 트럼프 이후에도 계속될 것인가? 서울·북경·평양·베를린은 트럼프 대통령이 퇴장하더라도 트럼프식 포퓰리즘(일방주의, 미국 우선주의)과 민주-공화당의 무한 대립을 걱정해야 하는가?

트럼프 현상의 뿌리는 깊다

윌슨 대통령

윌슨 대통령

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혹은 2024년에 퇴장하더라도 트럼프 현상은 계속되리라고 본다. 트럼프 없는 트럼프 현상이 지속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트럼프 현상은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기술과 경제체제의 변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명확히 확인된 바와 같이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 즉 트럼프 현상의 동력은 백인 고졸자들이다. 이들의 중추는 곧 제조업 미국을 뒷받침해온 산업노동자 계층이다. GM자동차, 엑슨 모빌 석유회사, US스틸 철강 회사 등에서 젊음을 바친 노동하는 미국인들이다. 제조업이 미국 경제와 세계경제를 이끄는 동안, 이들은 안정적인 월급으로 자식을 교육시키고 집과 자동차를 장만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미국 경제를 이끄는 기업은 구글·애플·아마존·넷플릭스로 바뀌었다. 값비싼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젊은이들, 백인 노동자들의 눈에는 그저 히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터넷 세대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스피커, 넷플릭스 등을 만들어냈다. 아마존은 모든 쇼핑을 온라인으로 바꾸어 백화점과 상점들을 파산으로 몰아가고 있다. 머스크라는 괴짜 사업가가 만들어낼 자율 주행차는 수많은 트럭 기사, 택시 기사를 실업자로 내몰 것이다. 제조업의 소멸과 노동의 위기라는 거대 쓰나미 앞에서, 육체 노동자들에게 남은 것은 불안과 공포뿐이다.

둘째, 백인 노동자층의 불안과 공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끝없이 밀려오는 ‘낯선 이민자’들이다. 남미에서 밀려드는 이민자들은 값싼 임금으로 하층 노동자들을 위협하면서 기존 노동자들을 밀어내고 있다. 다른 한편 인도 출신 공학자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앉아 있는 데서 보듯이, 이민자들 가운데는 젊고 우수한 브레인이 수두룩하다. 미국은 이민으로 시작된 나라이고, 이민으로 활력을 유지하는 나라이지만, 어느새 백인 노동자들은 피부색과 언어·문화가 다른 이민자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노동의 위기, 커져가는 빈부격차, 이민자들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단순하고 유혹적인 해법을 들고나온 이가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미국-멕시코 국경에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한 철제 장벽을 설치하고,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통해서 일자리 문제를 단시일 내에 해결하겠다는 달콤한 약속은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지난 4년간 백인 노동자들의 살림살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제조업의 위축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민 이슈는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최악의 인종 갈등이 지금 미국을 갈라놓고 있다. 미국 역사를 주의 깊게 지켜보는 사람들은 2020년의 미국이, 남부와 북부로 갈라져서 61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싸웠던 남북전쟁 시기(1864년)의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예전을 돌아보자면, 100년 전 대통령의 뇌졸중 때문에 윌슨의 이상주의 외교는 한바탕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불붙인 분노의 포퓰리즘과 미국의 분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미국 포퓰리즘이 쏟아내는 분노, 그리고 처절하게 갈라진 채 싸우는 미국 정치의 혼란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시한폭탄, 미국 대선의 우편투표

미국은 연방 공화국(United States of America)을 구성하고 있는 50개의 주가 각각의 규칙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코로나 위기에 대응하는 선거 관리의 변경도 50개 주마다 천차만별이다. 예컨대 캘리포니아 주는 이번 2020년 선거에 별도의 절차 없이 모든 유권자에게 우편 투표를 허용하고, 우편투표는  공식투표일(11월 3일)의 29일 전부터 절차가 시작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유권자가 별도 절차를 거쳐야만 우편투표를 할 수 있는 주들도 많다.

문제는 우편투표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이다. 민주당 바이든 지지자의 47%는 코로나 우려 때문에 우편투표를 할 예정인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는 단지 11%만이 우편투표를 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의 65%가 우편투표 절차가 신뢰할만하다고 믿는 반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단지 23%만이 우편투표 절차를 신뢰한다. (NBC뉴스, 2020년 8월 9~12일)

코로나 증세를 회복하고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이 절차와 관리의 문제를 이유로, 우편투표를 인정하지 않고 선거 당일 현장 투표 결과만 인정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는 순간(이미 그런 의중을 내비친 바 있다), 전례 없는 대혼란이 시작된다. 11월 3일은 어쩌면 혼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다.

장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