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이토록 현대적인 분청사기

중앙일보

입력 2020.10.06 00:16

업데이트 2020.10.06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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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높이 23.5㎝, 몸체 양면이 납작한 병입니다. 전체적인 모양은 어째 반듯한 것과는 거리가 좀 있고요, 그 병의 표면에 새긴 문양은 더욱 그렇습니다. 한쪽 면엔 쓱쓱 선으로 표현한 물고기, 또 다른 면에 무심하게 그린 듯한 기하학적 무늬가 눈에 띕니다. 그런데 이게 500~6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2018년 4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13만2500 달러(당시 한화 33억원)에 낙찰된 ‘분청사기 편호(扁壺·몸통 양면이 평평하게 눌린 항아리)’입니다. 분청사기로는 아직도 이 기록을 깬 것이 없는데요, 현대적인 미감이 두드러져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을 아는 컬렉터라면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명품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분청사기는 일제 강점기 시기부터 일본의 유명한 컬렉터가 소장해왔다고 하지요. 1996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조선전기 국보전’에도 소개된 바 있는데, 그동안 일본의 또 다른 컬렉터가 소장해 오다가 2년 전 경매 시장에 내놓았고, 당시 응찰자들 간에 치열한 경합 끝에  예상가 15만~25만 달러의 20배 넘는 가격으로 낙찰돼 화제를 모았습니다.

2018년 4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3억원에 낙찰된 분청사기 편호. [사진 가나아트]

2018년 4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3억원에 낙찰된 분청사기 편호. [사진 가나아트]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줄임말로, 15~16세기에 유행한 백토 분장을 특징으로 하는 회청빛의 도자기를 말합니다. 고려 말 청자로부터 변모·발전해 15·16세기 약 200여년간 활발하게 제작되다가 임진왜란 이후 그 명맥이 끊겼습니다.

분청사기의 매력이 도대체 뭘까요? 전문가들은 소박한 형태와 대담한 무늬가 빚어내는 독특한 미감을 첫손에 꼽습니다. 없는 듯 있는 균형감, 강약의 리듬이 살아 있는 문양, 거칠면서도 대담한 필치, 따뜻하고 은은한 빛깔 등이 한국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지금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고금 분청사기’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1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서 한 소장가의 품에서 잠시 나들이 나온 이 편호를 포함해 분청사기 명품 50점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가나문화재단과 국제교류재단이 함께 기획한 이 전시는 지난 7월 마이센 도자박물관, 11월 러시아 모스크바 동양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는데요, 코로나19 때문에 ‘해외 출장’을 떠나지 못하고 조만간 전체 전시작을 온라인으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국내 고미술품 전문가들은 “분청사기뿐만 아니라 한국 고미술품은 그 가치에 비해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에서 지나치게 저평가됐다”고 입을 모으며 안타까워하지요. 국내 한 컬렉터는 “언뜻 보면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보면 볼수록 ‘별것’이고, 마음을 사로잡는 게 바로 분청사기”라고 하더군요. 33억 원의 가격으로도 절대 충분하지 않다는 분청사기의 아름다움과 멋,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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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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