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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유행이 무슨 소용"…패션업계에 사계절이 사라졌다

중앙일보

입력

현대백화점그룹 패션기업 한섬의 여성복 브랜드 랑방컬렉션. 사진 한섬

현대백화점그룹 패션기업 한섬의 여성복 브랜드 랑방컬렉션. 사진 한섬

자타공인 ‘패셔니스타’ 직장인 박모(32)씨는 매년 이맘때쯤 나서는 가을 아우터(외투) 쇼핑을 올해는 포기했다. 재택근무 중인 데다 휴일에 나가지도 못해 새 재킷을 장만해도 입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박씨는 “가을이 오면 트렌치코트·스카프·가방 등 그때마다 유행하는 디자인·소재·컬러 별로 입는 재미가 있었는데, 올해는 지난 여름에 산 원피스도 아직 개시를 못 했다”며 “화상회의 때 입을 무난한 니트와 티셔츠, 카디건 정도를 살 생각”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가 바꾼 소비시장 ①] '시즌리스' 패션

패션업계의 사계절이 사라지고 있다. 계절을 고려하지 않는 ‘시즌리스’가 패션계의 새 트렌드가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장기화에 ‘홈오피스족’, ‘집콕족’이 늘면서, 계절 변화에 둔감해지고 유행에도 무감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방향으로 기후가 변화하는 것도 큰 요인이다. 일상화된 기상 이변도 시즌리스 패션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 겨울엔 평균 기온이 3.1℃로 평년보다 2.5℃나 높은 포근한 날씨 때문에 패딩이 팔리지 않아 국내 의류 업체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철마다 유행하는 디자인적인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 티셔츠·니트·데님 등 기본 아이템 비중을 늘려 실내에서 편하게 입으면서도 갖춘듯한 느낌을 주는 제품들이 '시즌리스' 패션 아이템의 특징이다.

텐먼스, 10개월 내내 입는 옷·슈즈 브랜드   

신세계인터내셔날의 텐먼스가 지난달 출시한 슈즈 라인 '마스터핏 슈즈'.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인터내셔날의 텐먼스가 지난달 출시한 슈즈 라인 '마스터핏 슈즈'.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지난 2월 처음 온라인 전용으로 선보인 텐먼스(10MONTH)는 ‘1년 중 10개월 내내 입을 수 있는 브랜드’라는 컨셉트로 인기를 끌고 있다. 계절뿐 아니라 나이, 체형, 유행과 관계없이 기본이 되는 상품을 판매한다. 이 브랜드는 런칭 일주일 만에 두 달 치 물량을 완판한 데다 지난달까지 매출은 목표 대비 3배를 넘겼다. 최근에는 신발 제작까지 나섰다. 기본 디자인이면서 편안함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현대백화점그룹 한섬은 타임, 더 캐시미어, 톰그레이하운드 등의 브랜드에서 올 가을·겨울 시즌리스 상품을 선보였다. 그중 니트·가디건 등 시즌과 무관하게 입을 수 있는 라운지 웨어(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편안하게 입는 옷)의 지난 7~8월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2% 증가했다.

한섬 관계자는 “니트·카디건 제품은 간절기에 외투로 입을 수 있고, 겨울철에는 패딩점퍼나 코트 안에 입는 등 활용도가 높아 가을 초부터 고객들에게 인기”라며 “특히 캐시미어 소재의 카디건은 재택근무 시 홈오피스웨어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찌 패션쇼 5회에서 2회로 줄여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패션업계의 오랜 관행인 시즌제를 없애기로 했다. AP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패션업계의 오랜 관행인 시즌제를 없애기로 했다. AP

시즌리스 패션에 대한 관심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는 지난 5월 기존의 신제품 발표 관행을 버리고 시즌리스 방식으로 제품을 출시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리폴(pre-fall·초가을), 봄·여름(S/S), 가을·겨울(F/W) 등 연중 5회에 걸친 신제품 발표 행사를 앞으로는 2회로 줄이겠다는 얘기다.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브랜드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무방비 상태로 비탄에 빠진 이 위기(코로나19)는 우리 모두를 본질적 시험 앞에 서게 했다”며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슈프림 등 스트리트 브랜드는 매달 혹은 정해진 기간에 소량의 제품을 출시하는 ‘드롭’ 방식을 택했다. 수십 가지의 새로운 디자인을 시즌마다 한 번에 선보이는 게 아니라, 한 두가지 제품을 매주 한정판으로 내놓는 개념이다.

MZ세대 "낭비 없는 지속가능한 패션 원해"  

톰그레이하운드의 캐시미어블렌드베스트. 사진 한섬

톰그레이하운드의 캐시미어블렌드베스트. 사진 한섬

전문가들은 패션업계에 시즌리스가 번지는 이유에 대해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 사회적 거리두기, 트렌드 실종 등의 이유도 있지만, 2~3년 전부터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지속가능한 패션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패션업계를 이끌어온 한 축은 패스트패션(SPA)이다. 소재보다는 디자인을 우선시해 가격이 저렴한 게 장점이지만, 이 때문에 한철 입고 버리는 쓰레기를 대량으로 만든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자라·H&M 등 SPA 브랜드는 2주마다 신제품을 내놓을 정도로 유행 주기가 짧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MZ세대는 환경 보호와 지속가능한 개발의 가치를 옹호하는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이 때문에 한 계절 입고 유행이 지나 버리기보다는, 오래 입을 수 있는 의류·신발·액세서리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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