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정상 전화회담 37번 가운데 한 번을 빼고 모두 배석했습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외교 경험이 부족하다”라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받아쳤던 답변이다. 아베 총리처럼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를 치는 케미스트리를 보여줄 순 없지만, 외교 정책에도 깊숙이 관여해왔다는 걸 어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일 정상 통화에도 당시 스가 관방장관은 배석해왔을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엔 배석했지만 나중엔 하지 않았다”이다. 관저 사정에 밝은 한 일본 정부 고위관계자는 최근 기자를 만나 “스가가 한·일 위안부합의 백지화 논란 이후 실망이 컸던 만큼 그 이후론 점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다”고 말했다.
스가 총리 취임 후 정상외교 순서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도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스가는 첫 번째 전화상대로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를, 두 번째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목했다. 미국은 제1의 동맹국이고, 호주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는 준동맹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로부터도 독일 총리, EU 상임의장, 영국 총리, UN 사무총장들과 회담을 가진 뒤에야 7번째로 순서가 돌아왔다. 역대 일본 총리들이 미국 다음 두 번째로 한국 대통령과 취임 인사 겸 전화회담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순서가 한참이 뒤처졌다.
스가 총리의 취임 기자회견에서도 한국은 없었다. 언론의 관심은 새 총리가 아베 전 총리만큼 미·일관계를 견고하게 이끌어갈 수 있을지, 악화된 미·중 대립 속에서 일본이 어떻게 균형을 취할 수 있을 지로 모아졌다.
일본이 한국을 소홀히 한다고 비난할 일만도 아니다. 2019년 1월 문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에서도 한·일관계는 관심 밖이었다.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온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돼 안팎으로 관심이 뜨거운 시점이었다. 기자회견 끄트머리에 한 일본 기자가 질문 기회를 얻기 전까진 문 대통령도 언급을 피하는 듯했다. 그마저도 “일본 기자를 지목한 게 아니었다”며 찬물을 끼얹었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한국과 일본의 거리가 멀어진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누가 먼저라든가 한쪽만의 탓이라고 하기엔 지난 몇 년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주변 외교환경의 변화에 따른 두 나라 전략의 차이 탓도 있을 것이다.
다만 대일 외교를 원칙 없이 대증요법으로 해왔던 건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총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갑자기 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건 오히려 독이다. 일본에서도 똑같은 물음이 나온다. 문 대통령에게 일본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윤설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