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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총리에게 한국이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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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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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정상 전화회담 37번 가운데 한 번을 빼고 모두 배석했습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외교 경험이 부족하다”라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받아쳤던 답변이다. 아베 총리처럼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를 치는 케미스트리를 보여줄 순 없지만, 외교 정책에도 깊숙이 관여해왔다는 걸 어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일 정상 통화에도 당시 스가 관방장관은 배석해왔을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엔 배석했지만 나중엔 하지 않았다”이다. 관저 사정에 밝은 한 일본 정부 고위관계자는 최근 기자를 만나 “스가가 한·일 위안부합의 백지화 논란 이후 실망이 컸던 만큼 그 이후론 점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다”고 말했다.

스가 총리 취임 후 정상외교 순서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도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스가는 첫 번째 전화상대로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를, 두 번째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목했다. 미국은 제1의 동맹국이고, 호주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는 준동맹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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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그로부터도 독일 총리, EU 상임의장, 영국 총리, UN 사무총장들과 회담을 가진 뒤에야 7번째로 순서가 돌아왔다. 역대 일본 총리들이 미국 다음 두 번째로 한국 대통령과 취임 인사 겸 전화회담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순서가 한참이 뒤처졌다.

스가 총리의 취임 기자회견에서도 한국은 없었다. 언론의 관심은 새 총리가 아베 전 총리만큼 미·일관계를 견고하게 이끌어갈 수 있을지, 악화된 미·중 대립 속에서 일본이 어떻게 균형을 취할 수 있을 지로 모아졌다.

일본이 한국을 소홀히 한다고 비난할 일만도 아니다. 2019년 1월 문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에서도 한·일관계는 관심 밖이었다.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온 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돼 안팎으로 관심이 뜨거운 시점이었다. 기자회견 끄트머리에 한 일본 기자가 질문 기회를 얻기 전까진 문 대통령도 언급을 피하는 듯했다. 그마저도 “일본 기자를 지목한 게 아니었다”며 찬물을 끼얹었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한국과 일본의 거리가 멀어진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누가 먼저라든가 한쪽만의 탓이라고 하기엔 지난 몇 년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주변 외교환경의 변화에 따른 두 나라 전략의 차이 탓도 있을 것이다.

다만 대일 외교를 원칙 없이 대증요법으로 해왔던 건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총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갑자기 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건 오히려 독이다. 일본에서도 똑같은 물음이 나온다. 문 대통령에게 일본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윤설영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