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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그들만 맡는 냄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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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하준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하준호 정치팀 기자

지난 2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회의장. 국회의원들이 냄새를 맡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종이의 냄새’가 맞는 것이냐는 질문이 통일부 장관에게 날아들었다. 그날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공개한 북한 중앙위 통일전선부의 통지문을 두고서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핵심 실세였다는 한 의원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과 표명이 담긴 북측 통지문 내용에 고무돼 있었다. “북의 최고지도자가 대한민국의 국민과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해서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한 적이 있습니까?” 북측 통지문 속 ‘국무위원장 김정은 동지는 (…)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라고 하시었다’는 내용을 짚으면서다. 또 다른 여당 의원은 긴급현안질의란 회의 목적을 잊은 듯 “통일부는 통일에 대해 고민을 하라”는 엉뚱한 말을 했다.

김정은의 이례적인 ‘직접 사과’에 들뜬 그들의 심정은 알겠다. 비슷한 시각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 출연한 외교안보 원로 학자의 입에서는 “전화위복”이란 단어가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그는 “이 불씨를 어떻게 살리느냐, 북한이 이 정도 나왔으면 그다음은 우리가 할 노릇”이라고 했다.

한국 해군 함정이 지난 25일 공무원 이모(47)씨가 북한군에 사살된 북측 등산곶 인근 해역을 경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해군 함정이 지난 25일 공무원 이모(47)씨가 북한군에 사살된 북측 등산곶 인근 해역을 경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에 대한 이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그들이다. 이미 북한 당국과의 수차례 접촉으로 북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그들은 이번 사건으로 꽉 막힌 남북 간 소통 채널이 뚫리고, 교착상태인 남북관계에 다시 훈풍이 불길 기대하고 있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건 ‘남북관계 전문가’라는 그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다 안다.

사과할 일에 사과했다고 통일부 장관에게 사과의 의미를 물을 시간에 ‘사과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 북한군이 한국 국민을 사살한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판단·대처의 적절성, 향후 계획 등에 대해 울분을 토하는 국민을 대신해 따져 물었어야 했다. 이런 점을 지적하는 탈북민 출신의 한 야당 의원에게는 여당 의원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사과하라” “북한에서 사상검증 하듯 하지 말라” “처음이라 잘 모르나 본데…”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들이 맡는 북한 통지문 속에 담긴 ‘훈풍의 냄새’를 확신하는 듯했다.

한 여당 의원은 이런 말도 했다. “북측의 해역에서 이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 군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 해군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해적에 억류된 한국 국민을 구출하려고 할 때도 과연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군이 맨눈으로 식별 가능했다고 밝힌 그 시각, 사망한 공무원 이씨는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한국 해군 함정을 애타게 바라봤을지 모른다. 자신을 구해주길 바라면서.

종이 한장의 냄새보단 그날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게 먼저다. 남북관계란 ‘대의’에 무고한 국민의 울분이 또다시 묻히지 않길 바란다.

하준호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