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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대기업 징벌해야 세상 좋아져? 그건 경제민주화 허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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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주식회사의 오너는 법인이다. 주주는 주식의 주인일 뿐이다. 대주주가 오너처럼 행동하면 법의 칼에 뚫릴 수 있다. 한국에서 많은 대주주경영자들이 범법자가 되어버린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기업이란 무엇인가』 323~324쪽)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 #『기업이란 무엇인가』 최근 출간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 위한 억지 #장기번영 생각하는 경영자라면 #기업 해외이전 검토 안할 수 없어” #“재계 창업자 이후 3세 체제 되며 #이사회가 정상화 길로 가는 듯”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 대표가 오너가 아니라니. 하지만 이는 친기업 경제학자로 평가받는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 경제학과 교수의 최근작 『기업이란 무엇인가』의 핵심 주장이다.

신장섭 교수

신장섭 교수

신 교수는 이 책에서 주주 이익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두는 주주가치론이나 직원·지역사회·환경 등 이해관계자가 원하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이해관계자론(Stakeholder theory)을 모두 비판했다. 특정 이데올로기나 이해관계로 기업을 재단하고 법인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내놓은 게 ‘자유주의적 법인실체론’이다. 한마디로 기업의 주인은 기업 자신이며, 기업은 영속을 추구하는 장기번영공동체라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발발 이후 싱가포르에서 꼼짝 못 하고 있는 신 교수를 지난 20일 줌으로 인터뷰하고 이후 추가 문답으로 보완했다.

기업규제 3법(상법, 공정거래법, 금융그룹감독법)에 대한 경제계의 걱정이 많다. 이 와중에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3법의 국회 통과에 전향적인 입장을 밝혔다.
“김 위원장의 개인 생각일 뿐 야당 전체 의견이라고 보지 않는다. 야당에 표를 던졌던 40%의 국민 생각도 아니다.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을 합리화하기 위한 억지에 불과하다.”
기업규제 3법에서 가장 문제 되는 부분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때 대주주 권한을 3%로 제한하는 것과 다중대표소송제가 가장 심각하다. 대주주가 없어야 기업이 좋아진다는 걸 전제했다. 미국조차도 대주주 없는 주식회사는 숫자로 0.2%가 되지 않는다. 99.8%가 나쁜 기업인가.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소송 가능하게 하는 건 법인실체론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법무부까지 나서 징벌적 손배소송과 집단소송 대상을 확대하는 집단소송법과 상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대기업 책임이고 따라서 대기업들을 최대한 징벌해야만 세상이 좋아진다는 경제민주화 허구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상법은 원래 기업의 자유로운 상거래 활동을 촉진하는 정신을 갖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상법에서조차 기업 때리기 정책을 뒷받침하는 조항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넣어 상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있다.”
차등의결권 불허, 과도한 상속세제 등의 부담 때문에 해외로 본사를 이전하는 대기업이 나올 수 있다고 보나.
“기업의 장기번영을 생각하는 경영자라면 전문경영인이라도 기업의 해외 이전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해외 이전을 못 하면 해외 기업이나 투기자본에 회사를 뺏기는 일이 벌어진다. 상속세나 차등의결권 문제를 가족경영하려는 사람들의 이기적 욕심으로 치부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회사 주인은 기업 자신 … 대주주, 오너행세 하면 범법자 돼”

기업은 이런 것

기업은 이런 것

최근 LG화학이 이사회에서 배터리 부문을 물적 분할로 분사하기로 결정했는데 개인투자자들이 실망 매물을 쏟아냈다. 증권가는 호재라는데, 기업과 일부 주주의 입장이 확연히 다른 것 같다.
“경영자는 기업의 장기성장을 최우선으로 삼아 경영해야 한다. 주주 단기이익의 극대화가 목표는 아니다. 기업공개를 하자마자 주가가 ‘따상’ 혹은 ‘따상상’되는 것은 경영인의 관심사가 아니다. 공개 이후에도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경영자의 책무다. 주주가 목소리를 내려면 기업이라는 장기번영공동체의 일원이 돼야 한다. ‘먹튀’하는 사람들이 공동체 일원이 될 수는 없다.”
1989년 미국의 ‘패러마운트 대 타임’ 판결이 기념비적이라고 썼다.
“타임이 워너브라더스와 주당 70달러에 합병 협상을 하고 있는데, 중간에 패러마운트가 끼어들어 주당 200달러까지 제안했다. 타임 주주 입장에선 주당 3배 가까이 받을 수 있었는데, 타임 이사회는 패러마운트의 제의를 거부했다. 패러마운트가 소송을 냈는데, 델라웨어 대법원이 타임 이사회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에서 주주가치를 내세우며 기업을 약탈하는 ‘기업사냥꾼 시대’를 종결지은 판결이다.”
2017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옹호했다. 당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이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삼성 합병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이라며 부정적 입장을 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에 ‘윈-윈(win-win)’이었다. 지금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은 20조원인데 보유 주식의 가치가 42조원에 달한다. 제일모직이 보유하고 있던 바이오 회사들의 주가가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물산은 삼성전자라는 현재 가치주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제일모직은 바이오라는 미래 가치주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합병 비율이 결정된 것이다. 당시의 평가가 지금 실현되어 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이해관계자론을 외부인이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를 기업이 좇아야 한다고 규정하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공익근본주의 기업론이라고 비판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부에서 강요하면서 그것이 기업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관계자론이다. 사회적 책임이건, 주주가치건 얼마나, 어떻게 추구할지는 법인이 자유로이 결정할 문제다.”
책에서 “대주주경영인이 오너로서 행세하거나 외부에서 그렇게 부르는 호칭을 수용하는 것은 주식회사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오너이기를 원한다면 애초에 주식회사를 설립하지 말았어야 한다(380쪽)”고 썼다. 취지는 알겠지만 과연 한국 현실에서 ‘오너(대주주경영자)’에게 “당신은 오너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될까 걱정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단계는 이미 한참 지났다. 벌써 목이 날아갔거나 날아갈 지경인 고양이도 많다. 대부분 ‘오너’라 생각하고 행동하다 배임으로 걸렸다. 대주주 혹은 경영수탁자로서 절차에 맞게 경영에 개입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다.”
주주총회가 아니라 이사회가 최고 의결기구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사회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업 조직도 위계구조이고, 사외이사도 대주주경영자(오너)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
“과거엔 이사진에 들어오지 않으면서 경영의 전권을 휘두르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권한과 책임이 조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계가 창업자 이후 3세 체제가 되면서 이사회가 정상화의 길로 가고 있는 듯하다. 이재용, 정의선, 구광모 모두 이사로 정식 등재돼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기업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법인실체론이 결국 오너(대주주경영자)에게만 유리한 건 아닌가.
“기업이 잘되면 임직원도 좋은 거 아닌가. 대주주경영자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법인실체론에 맞춰 경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 정부나 주주로부터의 부당한 개입에 맞설 수 있다.”

신장섭 교수

1962년생.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신문 기자를 하다가 유학을 떠나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1999년부터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우중과의 대화』『경제민주화… 일그러진 시대의 화두』 등을 펴냈다.

서경호 경제에디터 prax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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