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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9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장원〉

튜브 배꼽 
-이미순

언제나 나는 나를 이겨내지 못한다
바람 든 여자같이
바람난 여자같이
옆구리 빵빵한 뱃살이 튜브라면 좋겠다

오늘 아침 식단은
차라리 풀밭이다
군고구마, 단호박, 돌미나리, 가지나물
가끔은 공기밥 절반 요거트는 간식이다

체중계 올라서면 눈썹마저 뽑고 싶다
백로나 왜가리처럼 한쪽 발도 들어보고
수류탄 안전핀 뽑듯
튜브 배꼽 빼고 싶다

◆이미순

이미순

이미순

전남 영광 출생. 전 학습·진로 코칭강사, 현재 서귀포 감귤체험 농장 운영. 문학모임 ‘새섬’회원

〈차상〉

오감 퐝퐝 죽도시장  
-박숙경

동빈 다리 건너와 어판장에 걸린 아침
서귀포를 떠나온 은갈치와 반짝이면
해풍은 입김을 풀어 아가미를 녹인다

몇 차례나 관통했던 천둥 번개 떠오르면
사내의 두 귓불은 갈수록 더 발개져
단칼에 원근해를 잘라 봉지 속에 가둔다

하루를 마무리한 사내의 등줄기엔
국밥집 귀퉁이의 나팔꽃이 또 업혀서
비릿한 숨 다독이며 어스름을 걷는다

〈차하〉

그믐달
-안금자

휘영청
밝은 날에
맺었던 언약인데

세상을
지나오며
시나브로 빛이 바래

이제는
야윈 모습의
은가락지 되었네

〈이달의 심사평〉

전 인류를 공포와 전율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 사태에다,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든 지난 여름의 기나긴 장마 탓인지 이번 달엔 작황이 다소 부실한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뿔을 다투었던 몇 편의 작품을 두고 이모저모를 살펴본 끝에, 이미순의 ‘튜브 배꼽’을 장원으로 뽑았다. ‘튜브 배꼽’은 무엇보다도 슬며시 웃음을 유발하는 해학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마지막 수의 “체중계 올라서면 눈썹마저 뽑고 싶다”와 같은 표현 속에서 다이어트에 목을 매고 있는 작중 화자의 심리 상태가 대단히 익살스럽게 포착되어 있다. 같이 보내온 ‘위미리 동백숲’도 좋은 작품이었으나, 외부인에게는 매우 생소한 제주도 고유어가 너무 많이 구사되어 가독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차상으로는 박숙경의 ‘오감 퐝퐝 죽도 시장’을 골랐다. 제목 속의 ‘퐝퐝’은 ‘포항포항’을 의미하는 지역의 언어인 동시에 포항 죽도시장의 생기발랄함을 표현하는 의성어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제목에 걸맞게 살아서 펄펄 뛰는 시장판의 생동적인 모습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내의 힘들지만 건강한 삶을 별다른 무리 없이 노래하고 있다. 차하로는 안금자의 ‘그믐달’을 뽑았다. 세태의 변화를 휘영청 둥글던 보름달이 은가락지 같은 그믐달로 변화하는 과정에다 비유한 작품인데, 평범하지만 고전적인 격조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심사위원 : 이종문(대표집필), 최영효

〈초대시조〉 

꽃 진 자리 
-배경희

봄이 오는 첫 길목에 목련이 피었다
초록이 길 낼 무렵 목련은 지고 있다
한순간 면목가증面目可憎처럼 아, 하고 꽃은 졌다

몸이 먼저 말하듯 없던 병도 터지고
세상 한켠 비바람에 한때는 가고 없다
세월은 꽃 핀 자리보다 진 자리가 길다

◆배경희

배경희

배경희

충북 청원 출생.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흰색의 배후』. 열린시학상. 경기문화재단 우수 작가 선정

힘든 시간들 속에서도 가을은 왔다. 감나무를 지나는 바람이 스산하다. 감들의 색깔도 초록에서 주황으로 넘어오고 있다. 곧 크고 달콤한 연시를 손에 쥐리라. 들판에서는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으리. 그것은 절대 때를 놓치면 안 되는 농사, 그 중요한 시간을 몸으로 답했던 농부들이 이룩한 축복. 그 시기를 딱 맞춰 내려와 준 햇빛과 비와 바람의 산물. 지난 모든 ‘지금’이 만들어낸 찬란한 가을.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현재라는 것을 안다. 의식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현재가 지나가면 과거가 되고 더 큰 자유와 성공을 꿈꾸게 되면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과거는 또 다른 현재를 만들기도 해 모든 시간들은 유기적으로 맞물려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현재는 짧아도 너무 짧다. 순간이다. 어쩌면 현재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매개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열심히 사는 것이다. 이때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목련은 초봄에 피어 겨울의 시달림에 지친 사람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꽃이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사람들은 낙화를 보게 되면서 또 인생무상을 느낀다. 피었을 때의 고결함과 질 때의 “면목가증”이 유난히 대비되는 꽃이라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사람들 기억 속의 목련은 희고 탐스럽다. 그 우아한 자태로 일 년 내내 사람들의 가슴 속에 환하게 남아있다. 역시 이 시 화자의 진술처럼 “비바람에 한때는 가고 없”지만 “세월은 꽃 핀 자리보다 진 자리가” 긴 것이었다. 더 깊은 것이었다.

강현덕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 편수에 제한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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