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8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2020.08.27 00:03

업데이트 2020.08.27 01:16

지면보기

종합 18면

〈장원〉

군밤
-정두섭

로데오 사거리다 크리스마스이브다
죄 많은 이브가 화덕을 끌어안고
두봉토 오처넌, 떠리
밤을 깐다 밤은 깊다

얼어 죽은 눈 나린다
얼어 죽을 눈 나린다
아직 몇 봄 남은 이브가 건네는 밤
한봉토 삼처넌, 개팽
아직 몇 봉 남았다

◆정두섭
정두섭

정두섭

인천 출생. 서해종합건설 재직. 2019년 신라문학대상(시조), 2015년 시마을문학상(시) 수상.

〈차상〉

예덕나무
-양상보

이 봄날 또 누구를 홀리려는 것일까
서귀포 삼매봉 자락 슬며시 건너와서
어린 잎 가장자리에 립스틱을 바른다

서울의 청춘일 때 청량리 골목에도
저렇게 입술들이 떠도는 것을 봤다
밤마다 배고픈 별빛 훔쳐내고 싶었다

예덕아, 내 첫사랑 이름 같은 예덕아
노인성도 춘분이면 남녘 하늘 뜬다는데
한 평생 못 다한 말이 입술 끝에 떠돈다

〈차하〉

소 
-오대환

물난리로 강물에 떠내려갔던 소들이
우생마사 그말처럼 기적같이 살아왔소
감격에 겨워 그 큰 눈
그렁그렁 하였소

소를 찾은 주인이야 한없이 기쁘지만
집을 잃은 소들은 어디로 가야겠소?
갈 곳은 뻔하지 않소
살았어도 무섭소

〈이달의 심사평〉 

코로나19에 장마까지 겹쳐 세상이 온통 아수라인데 용케도 응모작들이 풍성하다. 새로운 이름들을 만나는 기쁨과 보편적 심상으로 심화시킨 작품들을 만났다.

장원은 정두섭의 ‘군밤’으로 택한다.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발로 쓴 시조다. 대상을 먼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가슴으로 보듬고 있다.

시어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현장에 담긴 “두봉토, 오처넌, 떠리, 개팽”과 같은 날것이다. 모든 수사가 허구와 상상이 절제된 상태에서도 “얼어 죽은 눈 나린다 얼어 죽을 눈 나린다”는 겨울밤의 정경이 오히려 선자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차상으로 양상보의 ‘예덕나무’를 올린다.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찾기가 시라고 했다. 속살을 짚어보면 예덕나무의 햇닢이 립스틱 색깔을 닮았나보다. 더 나아가 청춘과 첫사랑을 떠올리고 남국의 노인성에 “못 다한 말”이 떠돈다. 여린 촉수 하나로 이만한 상상력을 빚는 솜씨가 비범하다.

차하로 오대환의 ‘소’를 택한다. 이번 장마에 TV를 통해 보았던 시선을 포착했다. 사소한 것을 붙잡는 촉이 미덥고 이미지의 조형력이 뛰어나다. 시의 중심은 타자가 아닌 자신이라는 군말과 함께 문영 김재용 유정숙 제씨의 작품들을 응원하며 기대한다.

심사위원 : 최영효·이종문(심사평 : 최영효)

〈초대시조〉

비는 내리고, 하염없이 내리고
-서일옥

앞 코가 닳아 헤진 작업화 한 짝과
기름때 잔뜩 묻은 작업복이 울고 있다
울면서 껴안고 있다 수거함 속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조선소 외등은
자꾸만 빗물에 씻겨가는 불빛은
사내의 긴 그림자를 오래도록 쓰다듬는다

◆서일옥
서일옥

서일옥

199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조집  『하이힐』, 동시조집 『숲에서 자는 바람』. 가람시조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수상. 현 경남문학관 관장.

조선업의 불황으로 엄청난 그림자가 지역 사회를 덮치고 있다. 현재의 경기 불황은 코로나19로 인해 조선소만의 일은 아니게 되었지만 말이다. 한때 우리 조선은 세계 최강을 자랑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2010년대 중반부터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직 사태를 맞았다. 조선소가 있는 곳은 칼바람만 남아 그 지역 경기도 함께 무너졌다.

이 시는 그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앞 코가 닳아 헤진 작업화”와 “기름때 잔뜩 묻은 작업복”은 “사내”의 자랑이었고 우리 산업의 상징이었다.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이 여기에서 나왔고 우리 경제의 환한 빛 또한 여기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헌옷 수거함에서 서로를 “울면서 껴안고 있다”. 목숨 줄 같았던 그것들을 수거함에 넣고 돌아섰던 그 “사내”들이 피울음을 울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했을까. 하지만 “조선소 외등”은, “빗물에 씻겨가는 불빛”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사내의 긴 그림자를 오래도록 쓰다듬”고 있다.

그렇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대 최장이었다는 지독하고 지독했던 장마도 마침내 끝나지 않았는가. 제방이 터지고 하천이 범람하고 산사태가 난 것을 본 후지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재산을 잃어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후지만. 그렇게 코로나19도, 이 불황도 다 지나가리라. 어느 순간 지나가고 말리라.

강현덕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 편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02-751-5314.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