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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해도 아름답네, 이 시대의 사랑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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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4호 20면

신준봉 전문기자의 이번 주 이 책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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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지음
은행나무

『아몬드』 작가 손원평의 새 소설 #네 남녀 감정 엇갈리는 『프리즘』 #영화감독 겸업 ‘침입자’ 연출 #사건 위주 벗어난 소설 선보여

요즘 소설가는 한 우물만 파지 않는다. 이를테면 영화도 만든다. 영화 감독도 겸한다는 얘기다. 천명관이 그렇고, 79년생 소설가 손원평이 그렇다. 손원평은 둘 다 손대는 예술인 가운데에서도 예외적으로 느껴진다. 소설 쓰다 영화도, 가 아니라 영화 만들다 소설까지, 인 것 같다. 두 분야에 발 들인 순서가 그렇다는 것인데, 희미한 가치판단도 살짝 얹은 표현이다. 잘 만들고 잘 쓴다는 얘기다. (천명관이 그렇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먼저 영화. 영화인 배출 사관학교로 한때 성가 높았던(지금은 위상 변화가 있다고 한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나왔다. 2005년 단편영화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으로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무엇보다 코로나 사태를 뚫고 장편 상업영화로는 처음으로 지난 6월 ‘침입자’를 개봉했다. 흥행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지만 코로나 변수로 정확한 계량이 어렵다. 뒤늦게 유튜브에서 찾아봤더니 처음에는 탐탁지 않다가 중반 이후 힘이 좋다. 저력, 가능성. 이런 표현을 갖다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소설. 청소년 소설 『아몬드』를 모르신다면 이 분야에 너무 무심하셨던 거다. 손원평은 60만 부 작가다. 물론 2017년 출간한 『아몬드』가 그렇게 팔렸다는 얘기다. 최근 ‘차트 역주행’을 실현했다. 세계적인 K팝 밴드 방탄소년단을 등장시킨 JTBC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멤버들이 이 책을 읽어서다. 출판사 창비에 확인해보니 방송 이후 4만 부가 출고됐다고 한다. (출고와 판매가 다르기는 하다)

드디어 『프리즘』. 막 나온 손원평의 새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소설은 3인칭의 다소 느릿한 이야기, 커다란 사건 없이 마음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 1년간의 계절 변화를 따라가는 연애소설이다.

영화감독도 겸업하는 소설가 손원평. 연애소설 『프리즘』을 최근 출간했다. [사진 예스24]

영화감독도 겸업하는 소설가 손원평. 연애소설 『프리즘』을 최근 출간했다. [사진 예스24]

서른다섯 백도원, 서른 넷 황재인(여성이다), 스물일곱 전예진, 스물다섯 이호계(남성이다). 네 남녀가 나온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이 엇갈린다. 사랑의 작대기, 큐피드의 화살은 역시 제대로 날아가는 법이 없다. 이제까지 우리가 읽은 숱한 사랑 서사가 그랬고, 몸소 체험한 경험세계의 진실이 그랬다. 사랑의 잔혹하고 참담한 현실에 좌절한 우리는 그래서 상상의 사랑 이야기에 매달린다.

『아몬드』, ‘침입자’에서 선보였던 능란한 스토리 텔링 대신 ‘느린 마음의 이야기’ 쪽을 택한 손원평은 역시 판타지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백마 탄 왕자가 잠들었던 공주를 만나는 일 같은 극단적인 해피엔딩은 나오지 않는다. 허황되기보다는 리얼하게 사랑의 생로병사, 한편으로는 윤리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의 성장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랑을 잃었던 적이 있는 우리. 이것도 감지덕지다. 마다하고 싶지 않다.

대체 사랑은 어떻게 찾아와 어떤 경로를 밟는 것일까. 사랑학 개론 일일 지도교사로 나선 손원평에 따르면 이렇다.

“상대가 마냥 우주 전체인 것만 같은 달콤함은 통상 한두 달가량 지속된다. 그러다 석 달쯤 접어들 무렵,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게 되는 단계가 찾아온다. 우주의 시대가 차츰 저물면서 일상이 책갈피처럼 딸려 들어온다. 그러다 갑자기 현실이라는 단어가 야비한 강도처럼 두 연인을 습격하는 것이다.” (63쪽)

이랬던 사랑에 대한 인식이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렇게 바뀐다.

“다시 깊은 내면에서 예진은 기다린다. 기대하고 고대한다. 갈망하고 염원한다. 아름다워도 상처받아도, 아파서 후회해도 사랑이란 건 멈춰지지가 않는다. 사랑의 속성이 있다면 시작한다는 것, 끝난다는 것. 불타오르고 희미해져 꺼진다는 것. 그리고 또다시 다른 얼굴로 시작된다는 것. 그 끊임 없는 사이클을 살아있는 내내 오간다는 것.” (261쪽)

푸념보다는 담담한 진술 같다. 사랑은 끊임없이 생성됐다 소멸하는 것이라는 관찰 결과를 긍정하고 어느 정도 달관한 끝에 사랑 앞에 움츠리지 않을 수 있게 된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런 손원평의 사랑학에 동의할지 말지는 당신 자유다. 다만 소설 속에서처럼 새로운 사랑에 뛰어들 수 없게 된 처지인 사람들은 도원·재인·예진·호계, 혹은 소설 바깥 현실 속의 도원·재인 등이 부러울 뿐이다.

신준봉 전문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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