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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월세’ 사는 인간…‘나만 살면 그만’ 행태 탓 고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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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3호 22면

시로 읽는 세상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는 시절을 반년 넘게 견디고 있다. ‘코로나 19’는 인간에게 ‘움직이지 마라, 모이지 마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우리의 제반 활동을 억누르고, 사회 시스템과 생활 방식을 허물고, 그래서 이 문명의 근본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듯하다. 백신 없는 시대에 방역 수칙을 따라 외출을 줄이고 모임을 취소하며, 외로운 짐승처럼 들어앉아 TV를 켜 놓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린다. 이따금 예전처럼 마음껏 활보하고 싶고 지인들을 만나고 싶어지다가는 불현듯 아, 내가 지구란 곳에 살고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기회주의 꼬집은 황지우 ‘겨울 산’ #기상 이변 등 생태계 위기 자초 #제 발등 찍어 상처받는 삶 짚어 #일상은 분투해서 얻어 낸 결과물 #바이러스와 더불어 사는 시대 #만나고 어울리고 나누는 삶 필요

#지구는 작다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지구에서 태양까지는 1억4960만㎞, 태양에서 명왕성까지는 약 70억㎞다. 광속으로 몇 분, 몇 시간이면 간다.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켄타우르스 자리 프록시마 성(星)으로 4.3 광년 거리에, 태양-명왕성 간 거리보다 무려 5300배나 더 먼 곳에 있다. 태양계가 과일 쟁반이라면 프록시마는 십 리 밖의 별이다. 지구를 지구본만큼 줄이면 명왕성은 200㎞, 프록시마는 160만㎞ 떨어져 있다. 이렇게나 작은 곳에서 인간은 무얼 하나.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황지우, ‘겨울 산’

‘세’ 살고 있다. 그것은 ‘어차피’가 알려주듯 운명적이다. 인간은 지구가 기른 가축과도 같다. 세살이가 근본 조건이므로, 실제의 전월세가 세입자의 고혈을 짜듯 지구 위의 삶은 ‘고통’이란 걸 다달이 요구한다. 삶 자체가 고통일 수도 있고, 사회의 계급적 모순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불평등 관계가 인간고의 토양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의 혼탁을 ‘겨울 산’과 더불어 견디던 시인은 정치적 기회주의의 이면을 짚고 싶었을까. 원칙 없는 이익 추종과 가치 실종은 목하 코로나 시대의 풍경이다. 무너진 원칙이 낳는 것은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는, 정치권의 타락과 민주주의의 후퇴, 진영 논리에 따른 극한 대립과 종교적 광신, 그리고 저만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적 행태들이다. ‘사색’이라는 반어는 아픈 줄 모르는 병이 더 중병임을 꼬집는다. 사실, 현대문명 전체가 지구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늘 돈 계산과 기회주의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지구는 크다

지구는 직경 1만2576㎞, 질량 6조×10억t의 몸뚱이를 가지고 시속 11만㎞로 우주 공간을 질주하는, 어마어마한 돌덩어리다. 그것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인간의 안위엔 신경 쓰지 않는다. 화석연료를 몇 십 년 더 때어 오존층이 지워지고, 온난화가 진행되어 남북극의 빙산이 다 녹아내리고,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자연 재해가 세상을 덮어도, 즉, 온갖 역병이 창궐해도 지구는 까딱도 않는다. 위기는 다만 우리의 문제다.

어느 때, 인간은 종말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무시무시한 세입자 같다. 제 발등을 찍으며 걷는 이상한 벌레 같다. 탄생 이래 제가 키운 생물 종들을 다섯 차례나 궤멸시킨 바 있는 지구가, 아아 다섯 번이나 긁었는데 왜 이렇게 가려운 거야 하며 여섯 번째로 머리를 긁기 전에, 인간은 어떻게든 이 가난한 월세를 연장할 방도를 찾아야 할 텐데. 다시, 황지우의 ‘삶’이다.

 비 온 뒤
 또랑가 고운 이토(泥土) 우에
 지렁이 한 마리 지나간 자취,
 5호 당필(唐筆) 같다.
 일생일대(一生一代)의 일획(一劃),
 획이 끝난 자리에
 지렁이는 없다.

 나무관세음보살

 -황지우, ‘삶’

‘지렁이’는 물론 인간의 비유다. 그는 한 세상 월세를 짜 바치며 제 더딘 생을 문득, 완주했다. 지렁이 보살을 등장시켜 시는 허무를 말하려는 걸까. 한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 시는, 짧고 희미한 한 줄의 ‘자취’로 요약한다. 다툼과 행패와 상처가 없는 저 깨끗한 진흙 문장은 물론, 금세 지워질 것이다. 이 지워짐을 현재에 당겨와 살자는 것, 그러니까 시가 삶과 죽음을 함께 다루려는 것은 기실, 삶에만 집착하는 기회주의와 허무주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한때 기이하게, 병원 순례기라 할 시들을 쓴 적이 있다. ‘위로’나 ‘병원’ 같은 작품들에서 무병한 화자는 위중한 이들 곁을 맴돌며, 같이 앓는다. 죽어 가는 환자 앞에서 나비를 사냥하는 거미가 미워 거미줄을 뜯어 버리거나, 폐병 앓는 사람이 누웠던 자리에 일부러 가 누워 보기도 한다. 세상천지가 병원이 된 시대에 고통받는 인간의 처지에 어떻게 다가갈까 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우리는 평소에 윤동주만큼 괴로워하지도 않고 동료 인간들에게 애써 다가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격리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시인의 그런 마음이 우리가 원래 지녀야 했던 것임을 알려준다. 일하고 먹고, 만나고 어울리고 나누는 삶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분투해서 얻어 내야 하는 것이었다. 코로나가 브레이크를 걸 때마다 우리는 더 힘겹게 움직이고 일하고, 더 간절히 만나야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나오는 시를 읽어도 지렁이가 나오는 시를 읽어도, 인간이 작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백신이 개발돼도 우리는 바이러스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영화 ‘콘택트’의 결말에서 주인공 엘리는 말한다. “우주에 우리만 있다면 그건 엄청난 공간의 낭비 아닐까?” 그녀의 말을 지금 상황에 맞춰 옮겨 본다. “우주에 생명체가 사는 별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그건 엄청난 기적이고 축복이었을 거야.”

이영광 시인·고려대 교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서정성과 불온함이 공존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집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등을 냈다.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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