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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두 편중 한 편꼴 양성평등테스트 탈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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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최근처럼 여성과 젠더가 우리 사회 주요 화두가 된 시기가 없었어요. 페미니즘 대중화란 표현이 적절합니다.”

여성·젠더 최근 영화계 최대 화두 #22회 여성영화제 출품작 많아져 #4일 문체부 주최 ‘벡델데이 2020’ #10년간 한국영화 성평등 되짚어

지난 4일 온라인 중계된 ‘벡델데이 2020’ 행사에는 성평등한 한국영화 10편 ‘벡델초이스 10’에 꼽힌 ‘벌새’ 김보라 감독(왼쪽부터)과 ‘우리집’ 윤가은 감독이 참석했다. [사진 한국영화감독조합]

지난 4일 온라인 중계된 ‘벡델데이 2020’ 행사에는 성평등한 한국영화 10편 ‘벡델초이스 10’에 꼽힌 ‘벌새’ 김보라 감독(왼쪽부터)과 ‘우리집’ 윤가은 감독이 참석했다. [사진 한국영화감독조합]

오는 10일 개막하는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박광수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행사가 온라인으로 전환됐는데도 기대 열기가 뜨겁다면서다. 그에 따르면 개막 전 진행한 ‘씨네페미니즘학교’는 수강 신청 오픈과 동시에 대부분 강좌가 마감됐다. 올해 지원작이 2배 넘게 늘어난 단편영화 제작지원 부문 ‘필름×젠더’를 비롯해 경쟁 부문인 ‘아시아 단편’ 등에서 역대 최다 출품 수를 갱신했다. 박 집행위원장은 “로카르노·부산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들이 여성 감독 작품 비율이 높아진 것을 영화제 홍보에 사용할 정도로 여성 관련 내용이 시대 흐름이 됐다. 1997년 제1회 영화제 준비 당시 우리나라 여성 영화감독이 7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라고 말했다.

‘여성’ ‘소수자’는 최근 한국 영화계의 두드러진 화두다. 영화진흥위원회 결산에 따르면, ‘벌새’ ‘윤희에게’ 등 페미니즘과 퀴어가 결합된 한국영화들이 올해까지 10만 관객을 돌파하며 독립·예술영화 시장에  붐을 일으키고 있다. 페미니즘 필독서로 꼽힌 원작소설로 인해 개봉 전후 평점 테러에 시달린 ‘82년생 김지영’은 논쟁이 오히려 흥행에 불을 붙였다. 기존 남성 위주 형사·정치 코미디의 성역할을 바꾼 라미란 주연의 오락영화 ‘걸캅스’ ‘정직한 후보’도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며 여성 주연 영화의 가능성을 높였다. 블록버스터도 예외는 아니다.

“기획 단계부터 ‘이건 별로인데’ ‘옛날이야기 같지 않아?’ 하는 것을 몇 가지만 쳐내도 자연스럽게 여성(캐릭터)들이 올라오더군요.” 연상호 감독의 좀비영화 ‘반도’를 제작한 이동하 레드피터 대표가 극중 자동차 액션을 시도한 모녀 캐릭터(이정현·이레)에 대해 귀띔한 얘기다. 민규동 감독은 “넷플릭스가 젠더 영역에서 다양한 콘텐트를 선보이는 이유도 소비하는 이가 있고 돈이 돼서다”라며 “대중이 좋아하면 변화는 따른다”고 했다.

지난 4일엔 한국영화 스크린 안팎 성평등을 되짚는 ‘벡델데이 2020’ 행사가 온라인 중계로 진행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영화감독조합 주관으로 지난해 1월부터 올 6월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중 양성평등 가늠 지수 ‘벡델테스트’에 충실한 작품 ‘벡델초이스 10’을 발표하고, 관련 심포지엄·좌담회를 열었다.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과 제작자 김지혜 아토ATO 공동대표, ‘벌새’의 김보라 감독, ‘미성년’을 제작한 이동하 대표 등이 참석했다. 주최측은 “(정부 주최) 양성평등주간의 첫 영화 관련 행사”라고 밝혔다.

10일 개막하는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10일 개막하는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에서 (①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나와서 (②)남자 얘기가 아닌 (③)대화를 할 것. 이 뻔하고 간단한 조건조차 통과 못 할 영화가 있겠어? 근데 정말 통과한 영화가 거의 없는 순간 이게 중요한 이야기가 되죠.”

이날 사회를 맡은 변영주 감독의 말이다. 벡델테스트는 영화 속에 여성이 얼마나 빈번하게, 주도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지 이 세 가지(①②③) 잣대로 판단하는 테스트다. 미국의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1985년 고안한 이래 업계에선 뜨거운 화두였지만, 대중에겐 지금껏 낯선 개념이다.

올해 ‘벡델초이스 10’엔 ‘82년생 김지영’ ‘메기’ ‘미성년’ ‘벌새’ ‘아워 바디’ ‘야구소녀’ ‘우리집’ ‘윤희에게’ ‘찬실이는 복도 많지’ ‘프랑스 여자’ 등 10편이 선정됐다.

상업영화 책임자급 스태프 성비

상업영화 책임자급 스태프 성비

관심이 커진 만큼 논란거리도 늘었다. 여성 관련 행사 초청 연사가 이후 윤리적 문제로 비판받거나 행사 장소로 선정된 곳이 ‘미투’ 논란 인물과 연관됐다는 반발로 행사지에서 탈락하는 사례도 생겼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우리집’ 등 여성 영화를 홍보한 최유리(아워스) 대표는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진 만큼 단어 하나도 고르게 된다. ‘여성스러운’ ‘아름다운’처럼 성별이나 외모를 특정하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여전히 통계적으론 남성이 절대 다수인 영화계의 다양성과 균형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4일 ‘벡델데이’ 행사에서 영화평론가 조혜영 영상예술학 박사는 “2009~2018년 10년간 한국영화 중 절반가량만 벡델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또 “2009년 15.2%에서 2018년 12.8%로 여성 감독 성비는 오히려 낮아졌다. (‘기생충’의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엑시트’의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 등) 여성 제작자들의 두드러진 활약 속에도 전체 제작자 중 여성 비율은 20% 초반에 머무른다”고 지적했다.

임순례 감독은 지난달 여성영화인모임이 발간한 인터뷰집  『영화하는 여자들』(사계절)에서 “영화산업에 진입하려는 세대의 젠더 감수성은 이만큼 높아져 있는데 영화계는 남성 중심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며 “여성 영화의 서사와 장르가 투자와 배급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산업 자본적 환경을 깊이 고민해볼 시점”이라고 짚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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