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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야지 공주님” 초등생에 그루밍 성폭행한 50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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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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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인 A양은 어느 날 채팅 어플에서 남성 B씨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자신을 30대라고 소개한 B씨는 A양에게 페이스북 아이디를 받았고 수시로 문자를 보내며 안부 인사를 건넸다. 아침에는 모닝콜을 하듯 “학교 가야지 공주님”이라며 A양을 깨웠고 오후에는 “학교는 잘 다녀왔냐” “오늘은 어떻게 보냈냐”며 일상생활을 물었다.

그는 A양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통해 재학 중인 학교는 물론 관심사나 취향, 크고 작은 심리 변화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대화는 물 흐르듯 흘렀고 B씨는 SNS를 통해 기프티콘과 문화상품권을 보내며 환심을 샀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데다 부모님이 안 계셨던 A양은 “예쁘다” “보고 싶다”며 애정을 주는 B씨에게 경계를 허물었다. 이후 B씨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는데 마음이 아프다. 얼굴 한번 보여달라”며 직접 만나기를 요청했다. A양은 B씨의 끈질긴 요청에 결국 대면했고 두 달 동안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온라인 그루밍 피해자, 성폭행 피해도 인식 못 해 

익명의 여성활동가 모임 edn(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이 7월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집회를 열고 디지털 성범죄의 완전 근절을 위해 텔레그램 'n번방'에 입장한 전원의 신상을 공개와 강력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익명의 여성활동가 모임 edn(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이 7월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집회를 열고 디지털 성범죄의 완전 근절을 위해 텔레그램 'n번방'에 입장한 전원의 신상을 공개와 강력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A양은 자신이 성폭행당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학교 선생님이 우연히 사건을 알게 돼 조사를 받을 때도 A양은 입을 다물었다. 성폭행 전후로 A양이 좋아하는 딸기 우유나 과자, 용돈을 준 B씨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주변의 설득으로 결국 A양은 입을 열었고 경찰에 검거된 B씨는 30대가 아닌 50대 남성이었다.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를 받은 B씨는 재판에서 A양이 자발적으로 응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B씨가 전과가 없고, 부양할 가족이 있으며 주변에서 탄원했다는 이유로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2년 6개월~5년인 의제 강간 기본 형량 중 가장 낮은 형량이었지만 B씨는 즉각 항소했다.

미성년자 심리적 지배하는 온라인 그루밍

n번방 사건의 주범인 '박사' 조주빈(왼쪽)과 공범 '부따' 강훈. 뉴스1

n번방 사건의 주범인 '박사' 조주빈(왼쪽)과 공범 '부따' 강훈. 뉴스1

A양의 사례는 온라인 그루밍(Grooming)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마부가 말을 빗질하고 목욕시켜 단장시킨다는 의미의 '그루밍'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온라인 그루밍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N번방 사건처럼 온라인 이용률이 많은 미성년자가 쉽게 휘말리게 돼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4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 따르면 온라인 그루밍의 수법은 보통 SNS를 통해 미성년자에게 접근해 칭찬을 하거나 고민을 들어주며 신뢰를 쌓은 뒤 피해자의 신상 정보를 모은다. 초반에는 피해자와 사귀는 척 가장해 얼굴 사진 등을 요청하지만, 점점 수위가 세져 요구하는 촬영물의 수위가 높아진다. 이때 피해자가 주저할 경우 이전에 보냈던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성년 10명 중 1명 온라인 성적 유인 경험

6월 1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우리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에서 참석자들이 함께 연대의 의미로 끈을 잇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스1

6월 1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우리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에서 참석자들이 함께 연대의 의미로 끈을 잇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스1

실제 여성가족부의 ‘2019년 성매매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중ㆍ고등학생 6423명 중 11.1%가 지난 3년간 온라인에서 성적 유인 피해를 봤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결핍이 있는 아이들이 주로 범죄의 대상이 된다. 미성년자의 경우 친밀감이 필요한 나이라 그루밍을 당하더라도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인식을 잘 못 해 신고를 안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선 온라인 그루밍을 처벌할 근거가 미흡하다. 현행법상 성적 유인이나 권유 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 특히 온라인 그루밍의 경우 이미 가해자에게 길들여진 피해자가 저항하는 경우가 드물어 여성 청소년의 일탈이라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전문가들은 미성년 성착취를 막기 위해선 유인 단계에서부터 법적 제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6월 국회에서 열린 ‘디지털 성 착취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토론회에서 윤정숙 한국 형사정책연구위원은 “오프라인상 물리적 행위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다면 이미 아동이 그루밍을 당했거나 비접촉 성 학대를 당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동을 보호하기에 ‘너무 늦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니세프 아동친화사법 자문단에 속해 있는 원혜욱 인하대학교 대외부총장은 “외국에선 아동과 청소년 상대로 성범죄 저지를 경우 가중 처벌된다. 한국도 미성년자의 심리적 상태 이용해 범죄를 소위 예비 단계 준비단계부터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말했다.

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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