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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2+4 조약 성사 뒤엔 ‘코카서스의 기적’ 있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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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호 16면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1990년 7월 15일 코카서스 회담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앞 오른쪽)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가운데),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왼쪽)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독일 연방사진자료청]

1990년 7월 15일 코카서스 회담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앞 오른쪽)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가운데),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왼쪽)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독일 연방사진자료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난 이후 수개월 동안 독일에선 엄청난 사건들이 잇달았다. 동독에서의 대규모 시위와 사회주의통일당(SED) 정권의 몰락 그리고 자유 선거와 시장경제로의 전환, 통일을 위한 준비 등등. 그 와중에 독일인들은 눈앞에 닥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프랑스·영국은 독일 통일 경계 #미국만 나토·EC 틀 안서 지지 #동·서독, 4대 전승국 4번 협상 #콜, 고르바초프와 구체적 합의 #독일, 나토 회원국 지위 등 관철 #54만 소련군, 동독 지역서 철수

한편으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전 세계는 하나가 되려고 하는 동서독을 주시하면서 통일된 독일이 1945년 이전과 같이 유럽에서 불안을 야기하고 공격성을 띄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에서 40년간이나 지속돼온 냉전 구조는 어떻게 될 것이며 50만 명 이상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의 군대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와 같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독일이 혼자 풀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독일 내부의 도전과제들에 관한 해법의 모색과 더불어 독일 통일과 연관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숨 가쁜 외교 활동이 펼쳐졌다. 외교 분야의 최우선 논의 과제는 1945년 6월 5일에 발표된 전승국들의 ‘베를린선언’에 의거한 독일 통치권력의 승계 시에 발생했던 권한의 유보와 관련된 내용이었으며, 이 유보 권한은 평화협정의 부재로 인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와 관련해 1954년 서독과 서방 전승국 간에 체결됐던 파리조약은 ‘독일 통일과 평화협정의 규정들을 포함한 독일과 관련된 포괄적인 4대 전승국들의 권리와 책임’에 관해 명시했다.

독일, 소련 해체 전 50억 마르크 차관 제공

동서독 분단 시절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체크포인트 찰리’가 2+4 협상이 시작되면서 철거됐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동서독 분단 시절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체크포인트 찰리’가 2+4 협상이 시작되면서 철거됐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두 번째 주요 현안은 독일의 동쪽 국경선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독일 영토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면적이 폴란드(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 일부)와 소련(동프로이센)에 귀속됐다. 어느 누구도 이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오더-나이세 선을 따른 영토의 귀속에 대해 서독은 국제법 차원에서 인정한 바는 없었다. 특히 폴란드의 입장에서 이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쟁점이 됐던 내용은, ‘동독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의 철수와 관련해 조직은 어떻게 하고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이며, 향후 유럽 안보상황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서독과 함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럽공동체(EC)에 속한 가까운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 통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통일이 되면 인구 8000만 명이 넘고 경제적으로 월등하게 앞서가게 될 독일의 출현으로 유럽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을지 우려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2011년 한스 자이델 재단이 수여하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상 수상 후 연설하고 있다. [사진 파트리크피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2011년 한스 자이델 재단이 수여하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상 수상 후 연설하고 있다. [사진 파트리크피셔]

오직 미국만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독일의 통일을 지지했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독일 통일을 서방 동맹국들의 장기적인 정책 목표라며 크게 환영했다. 미국은 독일을 새로운 세계 안보 구조 측면에서 중요한 파트너로 여겼고 독일 통일로 인한 유럽에서의 새로운 힘의 공백이 발생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은 나토와 EC의 틀 안에서 진행돼야만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미국의 분명한 태도로 인해 유럽의 전승국들도 결국 독일 통일을 받아들이게 됐다.

통일 독일이 나토 회원국이 되는 것을 소련이 용인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가장 큰 의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었다. 긴장 완화 정책을 실시해 서방 국가에서는 큰 인기를 누리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국내에서는 반대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반대파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됐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게다가 소련의 경제 상황도 붕괴의 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90년 5월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은 로타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소련이 6월이나 7월께 지급 불능 상태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1990년 6월 내부적으로 사분오열 상태인 소련 공산당의 제28차 전당대회 이전에 골수 공산주의 신봉자들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은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50억 마르크의 차관을 소련에 제공했다. 이는 물론 소련의 지불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1년 후인 1991년 8월에는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소련은 해체됐다.

독일 통일을 향한 열망이 거세지던 1990년 3월이 되자 외교부 관계자들은 소위 2+4 형태로, 즉 동서독과 4대 전승국 관계자들이, 서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관련 협상에서의 돌파구는 정상들 간의 만남에서 이루어졌다. 1990년 5월 30일에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워싱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통일 독일이 나토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는 가능성에 관해 원칙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2+4 협상은 독일 외교의 역사적 승리

4대 전승국 대표의 2+4 조약 서명.

4대 전승국 대표의 2+4 조약 서명.

그 이후 1990년 7월 16일 북코카서스 소재 고르바초프의 별장에서 열린 콜 총리와 고르바초프 서기장 간의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독일은 나토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며 ▶나토는 군축과 개혁을 이행한다 ▶독일은 대량살상무기의 제조와 보유를 하지 않으며 독일 연방군의 숫자는 최대 37만 명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1990년 초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이 합의는 ‘코카서스의 기적’으로 독일 통일의 역사에 남게 됐다. 당시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비공식회담 시에 콜 총리가 입었던 카디건은 독일 본(Bonn)에 있는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후속 협상으로 구체적인 지원 액수를 정하는 과정이 있었으며 이 세부 협상은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2+4 조약이 서명되기 이틀 전까지 계속됐다. 최종적으로 독일은 소련에 150억 마르크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이 밖에도 이전에 차관으로 제공했던 50억 마르크가 있었다. 소련군의 철수 작업은 총 4년이 걸렸으며 54만6200명의 병력이 동독 지역에서 철수했다. 1994년 8월이 돼서야 모든 철수 작업이 완료됐다.

2+4 협상은 외교 분야의 역작이었으며 독일 외교의 승리였다. 모든 예상과는 달리 단지 4번의 협상(5월 본, 6월 동베를린, 7월 파리, 9월 모스크바)을 통해서 40년간 유럽을 동서냉전으로 갈라놓았던 근본 문제들을 해결했다. 2+4 조약의 평화 규정을 통해 2차 대전의 상흔이 가장 극명하게 남아 있었던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이 전쟁의 유산을 종식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동시에 독일은 법적으로 4대 전승국의 관리를 받는 권한 유예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이후 소련이 한 차례 독일의 외교 주권을 침해한 일이 발생했다. 옛 분단 시절 베를린장벽을 넘다 동독 주민들이 사망한 사건으로 인해 체포영장이 발부됐던 에리히 호네커와 아내 마고트 호네커 부부를 1991년 3월 매우 은밀하게 모스크바로 빼돌린 사례가 그것이다. 이후 호네커 부부는 다시 칠레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독일 통일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동유럽의 인접 국가들인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에도 통일은 큰 선물이 됐다. 독일은 후에 이들 국가가 유럽연합(EU)과 나토에 가입하는 과정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국 역할을 했다. 30년이 지난 현재 미국이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폴란드로 이동시키려고 하자 나토와 EU 안에서 새로운 갈등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상황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프랑스도 또한 독일 통일로 인해 유로화 탄생이라는 혜택을 얻었다. 물론 유럽은 지금 이로 인해 많은 현안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번역: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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